역사/세계사

전성기를 이룬 왕의 묘호 세종(世宗)

올드코난 2015. 4. 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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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의 묘호는 국가의 전성기나 안정기를 이룬 황제나 왕제게 붙여진 것으로 다른 묘호들에 비해 많은 왕들이 받았고 받기를 원했다. 가장 인기 있는 묘호 세종을 받은 왕들에 대해 정리해 본다.

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3탄 전성기를 이룬 왕 세종(世宗) 설명


1.조선 - 세종대왕

조선의 제4대왕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 성(姓)은 이(李), 휘(諱)는 도(祹),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사후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시호(諡號)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 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沈溫)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고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倭寇)를 토벌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참고: 세종으로 알려진 신라의 노리부의 세종은 묘호가 아니다.

세종(世宗) 노리부(弩里夫, ? ~ 588년)는 은 가야의 왕족으로 신라 진흥왕 및 진평왕 때의 장군이며 재상이었다. 구형왕의 장남으로,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다.

노리부(弩里夫)는 이름의 음을 표기한 것이고, 세종(世宗)은 이름의 뜻을 표기한 것이다.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내례부(內禮夫)라고도 한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구해왕)의 장남으로, 법흥왕 19년(532년)에 구형왕이 가족과 함께 신라에 귀순하면서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2.중국의 황제들

(1)세종 조갑(世宗 祖甲)

상나라의 25대 군주. 성은 자(子), 이름은 재(載). 전임 군주 조경의 남동생이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33년간 재위에 있었다. 포학무도해 상나라가 쇠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근데 왜 세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는지...?)

(2)전한 무제 (한무제)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로 아명은 체(彘), 자는 통(通)이다. 경제의 열번째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韓半島)에 한군현(또는 한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진 시황제· 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로 꼽는 이들이 많다.

(3) 사마사

진 세종 경황제 사마사(晉 世宗 景皇帝 司馬師, 208년 ~ 255년)는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자원(子元)이며 위 상국 사마의의 장남이자, 진왕 사마소의 형이다. 서진 황조에서 추증받은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황제(景皇帝)이다. 중국 삼국시대 당시 위나라의 황제 조방을 폐위시킬 정도의 권세를 누렸다. 전투중 눈에 입은 부상으로 결국 사망하고 동생 사마소가 권력을 이어 받는다.

(4) 전량 명왕 장중화

전량 세종 명왕 장중화(前涼 世宗 明王 張重華, 330년 ~ 353년, 재위 : 346년 ~ 353년)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5대 국왕. 자는 태림(泰臨),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명왕(明王). 330년에 장준(張駿)의 차남으로 태어나 346년에 장준이 죽자 16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직후 후조(後趙)가 침공해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을 빼앗기고 양주(凉州 : 간쑤 성 중서부)를 방어하였다. 이때 장중화는 사애(謝艾)를 등용하여 후조의 대군을 막도록 하였으며, 사애는 5차에 걸친 후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후조에 복속되었다.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前秦)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353년에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353년 말에 장중화는 병에 걸렸고, 어린 아들 장요령(張耀靈)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사애는 참소를 받아 주천(酒泉) 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는데, 장중화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사애에게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였으나 장조(張祚)가 유언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 시호는 환공(桓公), 동진 목제(穆帝)는 경열공(敬烈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에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5) 북위 선무제

북위 선무제 원각(北魏 宣武帝 元恪, 483년 ~ 515년, 재위:499년 ~ 515년)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제8대 황제. 묘호는 세종(世宗),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가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점차 불교 신앙에 빠져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되었다.

(6) 북제 추존 황제 문양제 고징

고징(高澄, 521년 ~ 54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동위의 실권자. 자는 자혜(子恵), 북제의 초대황제인 문선제(고양)의 형이자 추존 황제인 세종 문양제(世宗 文襄帝)

고징은 547년에 아버지인 고환이 죽자 승상이 되었다. 그 직후 하남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고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투항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징은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했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어 후경을 고립 상태로 몰아 넣었다. 이후 후경은 양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549년에 고징은 제왕으로 봉해졌다. 후경의 모반을 꺾었으나 주벽으로 인해 포악한 행동을 자주 해서 난경(蘭京)에게 살해당했다. 고환의 둘째 아들이며 고징의 동생인 고양(高洋)이 상국과 제왕을 물려받아 혼란을 수습했고 그 여세를 몰아 550년에 동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동위를 멸하고 북제를 건국했다. 사후 북제의 고양에게 세종 문양제(世宗 文襄帝)로 추존되었다.

(7) 북주의 제2대 황제 명제 우문육

우문육(宇文毓, 534년 ~ 560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주의 제2대 황제이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우문태의 서장자로 아명은 통만돌(統萬突)로 불리는데 이것은 534년에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에 머물렀을 때 출생 했던 것에 유래한다. 효민제를 살해한 우문호에 의해 즉위하지만 결국 우문호에게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살당했다. 우문육은 관대한 성격으로 인정 많고 도량이 컸고 친족을 아낀 동생이였던 우문옹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많은 책을 읽었다. 글을 짓는 것을 장려하였고 시문에도 발휘하였다. 즉위한 이후에는 학자 80명 이상을 불러서 북주의 역사서를 간행하였다. 자신도 많은 책을 수집하였고 10권의 저작을 남겼다.

(8)남조 (몽)의 제2대 황제 흥종왕 라선염

라성염(羅盛炎, 634년 ~ 712년) 또는 라성(羅盛)은 대몽국의 제 2대 국왕.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흥종왕(興宗王). 아버지 세노라가 죽자 674년에 즉위하여 712년에 죽었다. 援)을 파견하여 대몽국을 구원했다. 673년에 아들 성라피를 얻자, 라성염이 크게 기뻐하여 "내게 또 아들이 생겼으니 비록 당나라 땅에서 죽더라도 좋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성염은 실제로 712년, 장안에 가있을 때 서거하고 만다. 674년, 즉위하여 장건성(張建成)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675년, 요주만(姚州蠻)이 반란을 일으켜 토번에 항복하자 당은 어사(御史) 이지고(李知古)에게 토벌하게 하였다. 그 후, 712년에 서거하여 아들 염각이 왕위에 올랐다.

(9) 오월의 제2대 왕 문목왕 전원관

전원관(錢元瓘, 887년 ~ 941년, 재위 : 932년 ~ 941년) 본명 전전관(錢傳瓘, 932년 개명). 아명은 명보(明寶). 시호는 문목왕(文穆王). 중국 오대 십국 시대 지금의 절강 일대를 지배했던 오월의 제2대 국왕으로, 그의 아버지 무숙왕 전류가 그의 손에서 나라를 맡긴 932년부터 941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에 있었다. 오월의 후대의 모든 3명의 왕(3대 충헌왕 전홍좌・4대 충손왕 전홍종・5대 충의왕 전홍숙)의 아버지이다.

(10) 후주의 2대 황제 시영

시영(柴榮, 921년 10월 27일 ~ 959년 7월 27일)은 오대 십국 시대 후주(後周)의 제2대 황제(재위 : 954년 2월 26일 ~ 959년 7월 27일).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예무효문황제(睿武孝文皇帝)이다. 곽위의 양자가 되면서 곽영(郭榮)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대십국시대에서 제일의 명군으로 여겨진다.

(11) 요나라의 제4대 황제 야율원

요 세종 야율원(遼 世宗 耶律阮, 918년 ~ 951년)은 요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947년 ~ 951년). 시호는 효화장헌황제(孝和莊憲皇帝)이다. 요나라의 창건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야율배(耶律倍, 요 의종 문헌흠의황제(遼 義宗 文獻欽義皇帝)의 아들이었다. 숙부 요 태종 사후 즉위하였다. 요 태종은 야율아보기가 후당 왕조의 왕궁으로 떠난 뒤에 그를 길렀다.

(12) 명나라 제11대 황제 가정제

가정제(嘉靖帝, 1507년 9월 16일 ~ 1567년 1월 23일)는 중국 명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521년 ~ 1567년)이며 이름은 주후총(朱厚熜).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이다. 흥헌왕(興獻王)인 주우원(朱祐杬)의 차남으로 태어나 후사가 없던 정덕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불로장생설을 신봉하여 불로불사의 단약을 제조하는 것과 생부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하는 문제에 치중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또한 궁녀들의 월경액을 강제로 채취하다가 임인궁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정제는 재위 45년만인 1567년 방사인 왕금이 바친 단약을 먹고 앓다가 사망한다. 그 후 뒤를 이은 아들 융경제가 즉위했다.

(13) 청나라의 제5대 황제 '옹정제'

옹정제(雍正帝, 강희(康熙) 17년 음력 10월 30일 (1678년 12월 13일) ~ 옹정(雍正) 13년 음력 8월 22일 (1735년 10월 8일))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년 ~ 1735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작후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입관(入關) 뒤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세 번째 황제.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 권력 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과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하고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의 양면에 서있기도 하다.


3.베트남 왕조

후 레 왕조의 제 16대 황제 의제(1567년 ~ 1599년, 재위 : 1573년 ~ 1599년)

광남국 응우옌 왕조의 제8대 황제 효무제(1714년 ~ 1765년, 재위 : 1738년 ~ 1765년)


4.마무리

세종이라는 묘호가 전성기와 안정기를 뜻한다는 것을 보면 가장 적합한 인물은 역시 세종대왕이 아니신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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