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올드코난 2015. 3. 3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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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지도자로 호남 의병장인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진주에서 전멸한 뒤 다시 광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병이 조직되었다. 일본군이 침략하자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항전하였으나 이몽학의 난 관련자로 무고되어 억울하게 처형된 비운의 인물이다.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1.출생과 가계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

1567년 광주(光州)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장(神將)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2.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초에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노모의 봉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을 찾아가, 고경명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그러나 형 김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노모마저 1593년 8월에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다. 1593년 어머니의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아울러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표창을 받고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1월 김덕령은 의병군을 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출발하여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군을 쳐부순뒤 진주에 주둔하였다. 군율은 엄하였고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도의 의병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의병을 관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을 모두 김덕령 군에 소속시키었다. 그의 의병부대의 수는 증가했으나 명나라 군과 관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이 넘어갔고, 왜군들도 경남의 연안에 은거하면서 접전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김덕령 의병군은 별다른 접전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군공을 세웠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며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의 적극적인 사면 요청에 의해 석방된다.


3. 억울한 누명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 지역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뒤, 의병을 모집하여 진압하기 위해 충청도로 상경하다 반란이 진압되어 돌아갔다. 그러나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못한 졸개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했다. 이에 무과에 급제한 정식 장수이면서도 후방에 배치되거나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신경행이 무고로 난에 연루되어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마침내 8월 4일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압송당하여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4. 죽음

우의정 정탁 등의 구명, 탄원노력에도 불구하고 형문은 계속되었다. 1596년 8월 선조는 21일까지 그에게 6회 연속으로 직접 형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20여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5.사후

김덕령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부인 이씨는 백척 벼랑에서 몸을 던져 투신자살하였다. 아들 김광옥은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을 용안으로 고치고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년)에 다시 증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 12년)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6.영향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김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김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홍의장군 곽재우 역시 의병 활동을 하면서도 조선 조정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 이후 말년까지 은둔하게 된다. 그 외 많은 의병들의 사기를 꺾어 논 최악의 참사였다.


7.유적

김덕령은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오랫동안 묻혀 있다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8.올드코난이 생각하는 김덕령의 누명 원인

김덕령의 최후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가 결정적으로 관여한 것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국문을 할 때, 이들에게 엄히 벌할 것을 앞장서 주장한 것이 윤근수 윤두수 형제였다. 이들은 또한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원균 편에 섰던 인물이다. 만일, 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친일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윤치호가 이들의 후손이다. 사사로운 감정과 자신들의 안위만을 여겼던 이들은 훗날 형제 정승으로 국사책에 그 이름이 오른다.(차후 이들에 대한 글을 올린다.) 결국 김덕령의 최후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와 의심많고 시기심많은 선조가 자행한 만행인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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