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한말 4대 시인 순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 생애

올드코난 2015. 4. 1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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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선생에 대해 알아 본다.


1.출생과 가계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2. 11 ~ 1910. 9. 10)은 장수 황씨 황시묵과 풍천 노씨 사이에서 1855년(철종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세종대왕시절 명재상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후손이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집안은 몰락했다.


2. 왕석보의 제자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시골의 유생으로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전한다. 11세에 서당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왕석보는 1816년에 태어나 1868년 사망한 학자로 그의 문인으로는 황현 선생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이 있다.

황현은 스승 왕석보를 “호남 동쪽에 봉성현이 있는데 전 성 중에 탄환만한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선생이 나온 이후로 전 성이 봉성을 시향(詩鄕)으로 추켜 올렸다.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시파(詩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사 같은 분이야말로 한 지방의 풍기(風氣)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라 평했다.


3. 매천의 학문

황현의 학문과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서 시작되는데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학과 주자학을 공부했지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 이후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했고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고 전한다. 다산 정약용의 서적도 탐독했는데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황현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당시 부패한 정치상을 성리학과 세도정치에서 본 것이라 짐작해 본다.


4. 교류한 인물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지만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목격한 황현은 낙향해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후 처사형 선비로 비판적인 지식인의 삶을 산다. 서울에서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했고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황현 동생 황원은 “평생 문학적인 사귐은 영재, 창강 두 분이 제일이었지만 영재(寧齋)에게 더욱 쏠리어 꿈에도 1년에 늘 수십 번을 만났다. 늙어서는 조금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매천야록, 오하기문 저술

황현은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해 16년여 살면서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 데 몰두한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했다.


6. 을사조약 당시

1905년 을사조약직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다. 1906년 작성한 다른 시에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인사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풍자하였다. 같은 해 민영환을 추모하는 혈죽(血竹)이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영환의 숭고한 생애와 혈죽으로 환생하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후손들에게 나라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의연금을 모집하여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한 적도 있었다. 이후 중국에 망명했던 친구 김택영이 잠시 서울에 돌아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1909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입도(入都)라는 시에서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였다.


7.경술국치와 죽음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주권을 뺏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황현은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해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56세로 자결했다. 

황현은 유서(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남겼다.

해방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8.절명시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시 말미에 언급된 ‘윤곡’은 몽고 침입 때 자결한 사람이고, ‘진동’은 참형을 당한 인물로 황현은 무장투쟁이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소극적인 형태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여긴다. 


9.평가

시대를 잘못만난 천재로 그의 사상과 학문은 당시 민씨의 세도정치와 망국으로 가던 시기에 빛을 보지 못했다. 한 세대 일찍 태어났다면, 조금이나마 조선의 개혁을 위해 많은 공로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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