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무능하고 비겁한 겁쟁이 장군 원균(元均)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4. 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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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간혹 원균과 이순신 장군을 라이벌로 대립구도를 만들고는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라이벌은 서로 경쟁을 하고 어는정도 수준이 맞았을 때 하는 말이다. 원균은 충무공에 비할 바가 못되는 인물이었고, 얼마전부터 원균에 대해 동정론 혹은 맹장이었다고하는 잘못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특히 작년 2014년 10월25일에는 원균의 후손가문이 평택에서 원균의 기념 사업회조차 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역사왜곡과 역사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원균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보자.

임진왜란, 원균은 용맹한 장수였다? 사실이 아니다! 무능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허세 겁쟁이였던 장군 원균(元均)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은 1540년 음력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군 평택읍 도일동에서 무인 원준량(元俊良)과 남원 양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

원주의 호족이자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병부령, 원성백에 봉작된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원균의 선조들은 강원도 원주군에서 경기도 평택군으로 이주했다. 원주 원(原州元)씨의 경기도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元任, 또는 원몽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져 있다.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 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였던 원임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 출신이며, 아버지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외가로는 외조부 양희증(梁希曾)은 세조, 성종때의 학자인 양성지의 후손이었다.


2. 원균의 아버지 부패한 무인 원준량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세웠지만 그 인물 또한 문제가 많았는데,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원균이 많이 받았을 것이다. 원준량에 대해 요약해 본다. 

원준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고, 이후 춘추관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는데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었다. 1555년(명종 10) 달량포에 침입한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1557년(명종 12)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1562년 6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이후 사림파와 갈등하다가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목사에 이르러 1566년 12월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67년(선조 1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이 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 뒤 1577년(선조 1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사퇴하고 고향인 평택 도일동으로 낙향하였다.


그의 군 경력은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공적은 많지 않고 부정부패에 연루된 흔적이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들 원균을 무과에 부정합격시키려 한 행태다.

1564년 원준량은 아들 원균을 무과 초시에 규칙을 어기고 응시하게 했다는 죄로 탄핵당한다. 부정시험으로 아들을 합격시키려 한 것이다. 원균은 무과합격이 취소된다. 당시 이런 부정 합격자가 많이 양상되면서 임진왜란 초기 육지에서 조선군이 패배가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실록에 있는 내용을 올린다. 최옹이 올린 상서다.

명종 30권 19년 6월 21일 (신묘) 002 / 사인 최옹이 함경북도 병사 곽흘 등의 자제의 무과 응시에 관하여 아뢰다

사인(舍人) 최옹(崔翁)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 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일은 지금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한데,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구례대로 응시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조가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사관)은 논한다. "곽흘과 이택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그 중에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원준량은 갖가지로 재물을 긁어 들여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면서 날마다 파직되어 가기만 고대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 등이 일찍이 그의 뇌물을 받았기에 파직되어 갈릴까 염려되어 이렇게 임금을 속이어 아뢰었으니, 앞으로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3. 원균의 무인생활

부정합격이 들통나 합격이 취소된 원균은 오위(五衛 조선시대 중앙군)에 입대 충순위(忠順衛)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이후 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로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어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부임한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 토벌에 참여 조산보만호에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부사를 지냈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고 사간원이 비판한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 뒤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 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변방 근무시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을 하였다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나 관련 기록을 찾아볼수가 없다. 다만 부령부사로 특진을 한 것은 기록에 남은 확실한 사실이어서 어떠한 군공을 세웠다는 추측과 혹은 그의 친인척들이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기에 이들의 지원으로 승진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또한 시전부락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그는 예비대로서 참전을 해 딱히 군공을 세울만한 일은 없었다. 시전부락 전투에 참여한 이들은 후에 조선군의 중추로 성장하였고 이중에는 당시 원균과 동급의 신분으로 참전한 이순신 또한 있다.


4.임진왜란 초기 도망친 원균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 전쟁 몇 달 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원균은 2월에는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을 처음 바다에서 접한 자가 바로 부산의 바다를 책임진 원균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도주를 하는데, 이는 정사와 당시초유사 김성일이 남긴 기록으로 확인해 보자.

(1) 정사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하되, "사또가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로 보아 그 관할 경내에서 죽을 것이며 여기는 호서ㆍ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여기를 잃어버리면 호서ㆍ호남이 모두 위태롭습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모을 수 있고, 호남 수군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기문에는 그 비장 이영남의 말을 써서 구원병을 청했다 하였다.

(2) 당시 초유사 김성일 기록

1)우수영(右水營)은 수사(水使)(원균을 의미한다.)와 우후(虞候)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泗川) 해포(海浦)에 우거하고 있는데 격군(格軍) 수십 명 이외에는 군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고성(固城)이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으니,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 웅거하여 지킨다면 무너져 흩어진 인민들이 반드시 안집(安集)할 것이기에 두 차례나 수사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더니 수사가 지난 19일 성으로 들어가 지킬 계획으로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전날의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하였으므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2)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3) 류성룡의 징비록 중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배를 보고 겁에질려 3척을 남기고 80여척의 배를 자침시킨후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자신또한 도망가려고 하자 부하 이영남이 말리며 "군인의 임무는 이기든 지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데에 있습니다. 당장에 적의 수에 당황하여 나머지 부대마저 해산하여 도망친다면 상감께서는 필히 이에대해 문책하실께 분명합니다. 청하건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최선책 일듯합니다. 


임진왜란 첫 전투에서 원균은 왜군을 보고 싸울 생각은 못하도 도주한 것이다. 초유사 김성일이 당시 경상도의 전투 상황을 보고했는데 원균은 배 한 척으로 곤양에 숨어 있다 고성의 빈 성을 탈환하라고 명령해서 나아갔다가 적이 오자 다시 후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원균이 군영을 스스로 불태운 사실과 김준민이 거제도를 지키고 있어 거제도에 아직 적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원균은 왜군을 두려워해 싸워 보지도 않고 못한 것이다.

원균은 겁쟁이였지 절대 맹장은 아닌 것이다.


5.이순신은 원균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원균행장록에는 원균이 직접 지원 요청을 했지만 이순신이 주저하며 거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면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은 수군의 전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순신의 자수영이 출정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요청) => 경상감사 (조정에 장계) => 조정 (검토후 승인) => 전라감사 (조정의 승인으로 지시) => 전라좌·우수사 (출정 명령 가능)

이런 절차를 받지 않고 출병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임진왜란 초의 조선군의 편제였다. 이후 전쟁이 지속되면서 지휘체계가 다소 간소해진 것이지 임진왜란 초에는 이런 긴 절차가 왜군에게 쉽게 패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 드러난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공문을 받자마자 조정의 구원요청이 있을 경우 바로 출동할 수 있게 관내 기지 함대들에게 본영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당시 이순신 장군의 권한은 조정의 승인 없이 병사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6.공적만을 탐했고 전투는 피했던 원균

임진왜란의 첫 번째 해전 옥포해전에서 조선함대는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중 이순신 함대의 전과는 21척 원균함대의 전과는 5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이 공을 세우기 위해 왜군들의 수급을 베는 일에만 너무 집착한다고 비난하는 장계를 올린다.

우수사 원균은 단지 3척의 배만을 거느렸는데, 신의 여러 장수들이 잡은 왜적의 배를 심지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빼앗으려 하었는데 통에 두사람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주장으로서 부하 단속을 하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원균을 옹호한 자들은 “원균은 왜군을 육지로 유인, 육지에 올라서 그들의 칼날을 피하고"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싸워보지도 않고 밀렸다는 것을 좋게 쓴 말이다.


7.표면적으로 드러난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으로 보는데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이에 조정과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고 이후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은 공공연히 외부로 표출되었는데 왜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이 심해지자 선조는 사람을 시켜 이들의 갈등 과정을 조사하여, 파악하게 된다.

*여기에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이 장계로 갈등이 표면화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이 두 사람은 같이 갈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순신은 원칙과 능력, 덕을 갖추었고, 왜 싸워야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던 명장이었지만, 원균은 공적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고 허세는 있되 용기는 없던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같은 길을 갈수 있겠는가.

이순신 장군이 원균을 유독 싫어했던 것은 사람 자체가 문제가 많았는데, 이런 인물이 경상도 바다를 책임지고 있었기때문인 것이다. 이런 원균을 좋아하는 것인 문제가 아닐까. 

(이명박과 노무현 대통령이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와 같다고 보면 비유가 될까)


8.선조가 원균을 지지했던 이유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당파 문제도 있었는데, 선조는 동인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이런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동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중이 분명히 있었다. 왕권에 집착했던 선조가 의도적으로 동인들 대다수가 지지하는 이순신 보다는 서인의 원균을 키워주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동인인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하자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했고 여기에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알고 있었기에 선조의 원균을 의도적으로 높여주려한 것이다.

여기에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냉대와 원균에 대한 호평은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것에 대한 자괴감 이몽학의 난으로 인해 흔들린 왕권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군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김덕령 같은 의병을 처형하고 후일 군권을 쥔 권율은 매일 같이 선조에게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9. 충청도병마절도사 재임시

1595년 음력 12월 충청도병마절도사(충청병사)로 진급 및 전출되었고, 충청병사로 재임시 1596년초 왜적을 막기 위해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수리하는데, 이 상당산성은 무리한 공사로 인해 많은 원망을 들었고, 완성된 직후 비가 오자 다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원균은 이 시기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당시 사헌부 장계 내용]

(1)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사람됨이 범람(泛濫)하고 게다가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5∼6월에 입방(入防)한 군사를 기한 전에 역을 방면하고 그 대가로 씨콩을 거두어 다 농사(農舍)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심원해(沈源海)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용렬합니다. 환자곡(還上穀)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여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소를 잡아 민간에서 재리(財利)를 꾀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을 위해 경내에 집을 경영하고 전토를 널리 차지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고 보는 이들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봉산 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전에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이 없고 비용이 너무 과람하여 길가의 거읍(巨邑)이 탕진되어 텅 비게 하였으니 체차(遞差)하소서.” 

(2)“각도의 병사(兵使)에게는 본래 종사관(從事官)이 없는 법인데,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전 군수(郡守) 최덕순(崔德峋)을【사신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行在所)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臺官)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원균은 성을 짓는 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착취했으며 공사또한 날림을 했으니, 원균의 도덕성과 장수로서 관료로서 매우 무능하다는 것을 충청병사로 재임시에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10. 원균을 불신했던 조정 신하들

선조와 서인들이 원균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원균이 문제가 많은 장수임을 당시 신료들이 선조에게 충언을 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5대 명재상이었던 오리정승 이원익 대감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투에 임할 때와 평상시와는 같지 않습니다. 원균(元均)과 같은 사람은 성질이 매우 거세어서 상사(上司)와 문이(文移)하고 절제(節制)하는 사이에 반드시 서로 다투기는 합니다만 전투에 임해서는 제법 기용할 만하다고 합니다.”

“원균은 전공(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원균에 대해서 이원익 대감의 평가가 중요한 것은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보기드문 청백리였기때문이다. 일생을 백성을 위해 살다간 분으로 청빈하게 살았으며, 어떤 비리에도 연루되지 않은 훌륭한 분이셨기에 이원익의 원균에 평가는 틀린 것이 아니다.


11.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명나라와 일본의 교섭이 깨지면서 1597년 1월 일본군이 다시 남해안에 상륙한다. (정유재란) 이 당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매우 높아졌던 시기로, 선조는 2월 이순신을 파직하고(자세한 내막은 이순신 편에서 정리함) 한양으로 압송한다. 그리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여기에는 원균이 선조에게 올린 상서가 결정적이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永登浦)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加德島)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絶影島)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백 여 명이나 2백 명씩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이 수군을 지휘하면 반드시 승리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상급자의 작전을 문제삼는 심각한 월권행위이며 경상도의 주요 항구와 포구, 거점들이 왜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 있었고 왜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해 실효성이 없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원균은 수사로 임명되자 말을 바꾼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수사로 재임명하자는 논의가 있던 중 1597년 정월 이순신이 순신이 두류(逗留)하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군기(軍機)를 그르치게 되었다는 이유로 언관들의 탄핵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고 옥에 갇히자 2월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12. 거제도 전투의 패전을 숨긴 원균

원균은 막상 수군 통제사가 되자 바다로 나가기를 주저했다. 원균은 '적이 거짓말로 속임을 미루어 살피고서 아군의 힘으로는 부산 바다로 들어가 토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전투를 회피하자 조정에서 독촉한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그렇다면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육군으로써 몰아낸 이후에야 들어가 싸울 수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것은 스스로 부산포에 나가겠다는 상소 때문이었고, 당시 조선의 병력 동원능력을 넘어선 30만의 육군이 출동해 섬인 가덕도를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쳐 달라는 비현실적인 주장 때문에 조정에서는 들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은 육군에서 밀리고 수군이 강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 수군이 왜의 수군을 먼저 괴멸시켜야 전쟁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원균에게 서둘러 수군이 나서라 명했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1597년 3월 25일 (음력) 원균은 통제사가 된 후 첫 승전을 보고하는데, 거제도로 나무하러 온 왜적 80여명을 강화 회담 중이라는 걸 핑계로 술을 먹여 안심시킨 후 부산포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가 조선 수군 전체가 공격하여 전멸시켰다는 것이었다. 비변사에서는 나무하러 온 적을 잡아서 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선조는 나무하러 온 적 역시 적이라면서 상을 주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성 현령 조응도와 140여명의 병력이 전멸하고 판옥선을 뺏겼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피해를 입은 왜 측에서 주장하는 죽은 병사의 수가 더 적고 원균이 올려보낸 수급이 47급이었다는 것에서 일본측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는데, 이 전투 아닌 전투에서 원균은 47명을 잡는 대신 140명과 판옥선 한 척을 잃은 패전이었다는 게 이후 확인되었다.

이때 선조와 조정은 원균을 파직했더라며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3.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원균

1597년 7월 초에 왜의 첩자 요시라는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왜선(倭船)이 지금 연이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주사(舟師)로 요격한다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것이오.'라고 거짓 정보를 준다.

원균은 왜인의 말이라 믿을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은 출전을 명하고 6월 말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웅천(熊川) 앞바다로 나갔으나 평산포만호 김축과 보성만호 안홍국이 적탄을 맞아 전사했고, 수군은 별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된다.

당시 원균은 2월 초에 이순신이 동원했던 63척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판옥선 134척을 동원했었다. 최소한 병력면에서 밀리지는 않은 상황이었는데 왜군의 추가 지원군이 나타나자 원균은 바로 군대를 물리고 지원군을 요청한다. 그리고 원균은 계속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이 없애 주기만을 고집했고,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 원문(轅門)에서 곤장을 쳤다. 원균은 어쩔 수 없이 부산포 앞바다로 향하게 된다.


1597년 음력 7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이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도주하자, 원균은 급하게 추격하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뱃사람들이 이미 수령(水嶺)을 넘었노라고 고하니 이때 놀라 급히 배를 돌려 퇴각했지만 파도에 의해 12척의 배를 잃게 된다. 후퇴 후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급히 내렸는데 가덕도의 적이 공격해 왔고 원균은 400명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퇴각한다. 2월 이순신 역시 가덕도에서 공격받았지만 5명이 전사하고 1명이 생포되자 가덕왜성을 공격했고, 요시라가 급히 건너 와서 포로가 된 아군을 돌려 주는 조건으로 공격을 멈추기로 합의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결과였다.

이에 권율은 원균을 다시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부산포로 나갈 것을 종용한다.

권율이 원균을 미워했던 것은 이순신을 무고한 이유가 마치 자신이 수군을 통솔하면 이길것처럼 허세를 부린 점과 이순신을 몰아냈기때문이며, 인간적으로도 무척 싫은 자였기때문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원균이 조정을 기만했기에 곤장을 친 것이다.


14.칠천량 해전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전사하고 조선 수군은 괘멸당한다. 이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은 없고, 원균을 두둔하는 억지스런 기록(원균행장)이 마치 원균이 최선을 다해 싸우다 전사한 것처럼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균은 겁을 먹고 지 혼자 살겠다고 도주하다 패한 것이다.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던 김완의 진술에 의하면 아군을 쫓아오는 적이 겨우 두 척이었고, 아군이 무질서하게 도주한 게 아닌 각기 수사를 따라 후퇴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원균이 지휘권을 유지한 채로 소수의 적 때문에 수군 전체를 춘원포로 이끌었다는 것이고 이는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 온 정기수의 보고에도 드러난다.

배설이 이끄는 병력 이외에 임치 첨사 홍견, 가리포 첨사 이응표, 해남 현감 류형,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등 많은 장수들이 춘원포가 아닌 한산도로 퇴각하였다는 것과 한산도가 함락된 것이 칠천량 해전 이후 일주일이 넘은 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견내량이 막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런데도 통제사 원균은 춘원포에서 육지로 도망쳤고 수사 이억기와 최호는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봐서 원균은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로 춘원포로 후퇴했고, 지휘를 따르지 않은 배들은 한산도로 퇴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군감들이 평가한 칠천량 해전의 전과는 시마즈 160척, 와키자카 야스하루 12척 등으로 200척을 넘지 않는데, 판옥선 이외에 조선 수군의 총 병력이 300척을 넘었다는 것과 전공이 보통 과장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해전의 승리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큰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전멸을 당한 것은 아니고 무능한 원균이 지휘를 포기하고 도주하는 바람에 조선 수군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이후 배설의 12척과 1척을 더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를 해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두는데, 이후 조선의 수군이 보강된 것은 배를 다시 만들어서보다는 칠천량 해전에서 흩어졌던 수군들이 다시 합류를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일, 원균이 겁을 먹지도 않았고 조금만 유능했어도 칠철량해전이 그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15. 원균의 최후는 장렬하지 않았다.

원균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명확하게 원균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권율의 서장에 따르면 군율이 군관 최영길에게 듣기를 원균은 사지를 빠져나와 도망쳐 진주까지 와서 최영길이 그의 말을 들었다라고 했다. 그 뒤 원균이 살아있으니 찾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 내에서 반복되지만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선조가 응하지 않은 것은 원균을 기용한 것이 선조이기에 만일 원균이 장렬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도주를 한 것이라면 왕의 권위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8월에 원균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책임을 물어야 된다는 내용이 있지만 인조 반정후 다시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에는 7월 16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가 선조를 계승했기에 불편한 내용을 가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원균은 도망치다 숨어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의 목을 원한 것은 왜군이며, 만일 전사를 했다면 왜군이 그의 목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군 통제사라는 높은 관직을 가진 인물이 전사를 했다면, 최소한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목격한 조선 병사가 최소한 한 명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원균은 그냥 도망친 것이다. 


16. 마무리 올드코난의 원균에 대한 평가

선조실록을 쓴 당대 사관은 “원균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윤두수와 선조는 원균을 두둔했지만, 대다수 관료들은 원균을 싫어했다.

원균이 용장 혹은 맹장이었다고 주장하고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이다. 원균은 주로 아군인 조선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었지만 왜군만 보면 도망을 쳤다. 그리고 왕에게 어떤 말을 해야 먹히는지 아는 아부의 근성을 가진 인물이다. 자신의 전공을 돋보이기 위해 오로지 수급을 베는데만 급급했고, 실재 큰 공이 없으면서도 부풀릴 줄 아는 허세형 인간이었다. 

원균을 동정하는 이들은 원균 같은 자를 만나 보지 못했기에 어설픈 동정심이 앞선 것이다. 

원균은 잔인하고 이기적인 욕심이 매우 많은 자였다.


특히, 송시열이 쓴 원균행장의 영향으로 원균을 용맹한 장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원균은 겁쟁이였다. 왜군과 싸울 용기는 없고, 자리 욕심만 많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허세가 많은 이들은 원래 겁이 많은 겁쟁이들이다. 

그걸 숨기기 위해 허세와 허풍을 떠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이 왜 원균을 싫어했는지 되새겨보면, 그분의 훌륭한 인품이 원균 같은 자를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오히려 원균과 친구가 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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