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유능한 행정가 무능한 지휘관 김명원 (金命元)

올드코난 2015. 4. 1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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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하면 뛰어난 장수들도 있었지만, 무능한 장수또한 있었다. 여기에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고 반면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는 김명원에 대해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유능한 행정가 무능한 지휘관 김명원


1. 가계 및 관료

김명원(金命元, 1534년 ~ 1602년 12월 13일) 승지 김만균의 아들이자 이황의 문인. 자는 응순, 호는 주은, 시호는 충익, 본관은 경주.

조선 명종 대인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홍문관 교리로 임명된 형 김경원과 함께 홍문관 저작으로 임명, 다음해에 홍문관 박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권신 이량을 탄핵했다가 '몸가짐이 바르지 않고 여색을 탐하고 술을 즐긴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얼마후 복직해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와 관련된 요직을 역임한다.

1568년 함경도 순무 어사에 임명되었고, 1569년 종성 부사가 되었다. 이후 동래부사, 충청감사, 의주목사, 평안도 병마 절도사, 전라감사 등 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외직을 돌아다닌 경혐으로 김명원은 '무재(武才)가 있는 데다 변방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만약에 사변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직시키면 매우 편리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전라감사직을 맡을 당시 자신의 후임으로 심의겸을 추천했는데 이 일로 동인으로 여겨지면서 탄핵되기도 했지만 병조참판으로 그 자리를 유지했다.


2. 조선 최고의 군사 전문가

1583년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함경도 지역 여진족과 지속적이고 대규모의 군사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김명원을 함경도 관찰사로 파견(1584년)하였고, 김명원은 이 자리에서 병력동원, 물자공급, 백성원호 등 군사행정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좌참찬(左參贊) 겸 도순찰사(都巡察使)직으로 올라가 사실상 북변의 군사행정 및 감찰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며 유력한 중신이자 군사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직을 거친 후 중앙으로 복귀해 15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직을 겸하고, 1588년에는 형조 판서직을 역임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기축옥사를 수습하여 정국을 안정화시키고 그 공으로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에 봉해졌다.


3.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음력 4월 29일 도원수에 임명되어 한강에 주둔한다. 하지만 바로 하루전인 4월 28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군대가 전멸하고 조정은 바로 파천 준비에 들어가는데 이런 혼란의 상황에서 김명원은 한강을 지킨다는 것보다는 적을 지연시키는 것이 그의 사실상 임무였다.


이때 김명원의 병력은 불과 1천여 명이고 왜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 2만 2천 8백여 명과 남한강을 도하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 1만 8천 7백여 명 등 4만여명이나 되었다.

병력뿐만이 아니라 지휘에도 혼선이 생겼는데, 김명원 다음가는 지휘권을 지닌 이양원은 임진왜란 바로 직전까지 우의정을 역임한 고위관료로 김명원보다 우위에 있던 상급자였다.


최악의 상화에서 결국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김명원, 신각, 이양원은 모두 흩어진다. 이때 김명원은 임진강까지 후퇴해 거기에 방어선을 치기로 하고 다른 지휘관들에게 음력 5월 18일까지 집결하라 명했다. 그러나 전쟁 와중의 혼란으로 인해 강원도 쪽으로 후퇴했던 신각, 이양원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다. 이일, 김억추 등의 장수들도 행방이 불명인 상태에서 김명원은 혼자 임진강에서 싸우다가 음력 5월 17일 다시 임진강 전투에서 패하고 부장 신길, 유극량 등이 전사하고 겨우 살아 북쪽으로 후퇴한다. 


여기서 신각이 처형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임진강으로 철수한 김명원은 자신과 연락이 두절된 신각을 선조에게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라는 장계를 올렸고 선조는 신각을 참하라는 명령을 선전관에게 들려 강원도로 파견하는데 곧이어 강원도에서 해유령 근처에서 신각이 수습한 병력으로 적을 격파했다는 승전보를 받게 된다. 선조는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비변사에 의해 처형된 뒤였다. (이에 대해서 김명원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이후 윤두수, 이원익과 함께 평양성 수비를 맡았는데 윤두수와 함께 야습을 걸었다가 역습에 패배했고 대동강의 도하 요충지까지 알려주는 실수를 해 버리면서 결국 평양성도 왜군에 뺏기고 철수한다. 이후 이원익과 협력하여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서 순안에 주둔하여 재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일본군은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다. 김명원은 순안에 주둔할 적에 평북의 지형이 험해서 더이상 일본군이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후 평북에서 1만의 군대를 양성하는 등 조선군 재건에 노력했다.


1593년 송응창,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 원병이 1차로 파견되고 평양성 탈환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2차 평양성 전투) 이후 조선군 단독으로 김명원의 지휘아래 그동안 재건한 2만여 병력을 평양성으로 움직여 탈환을 시도했지만 다시 패한다. (3차 평양성 전투)


얼마후 행주산성의 대승리(행주대첩)가 알려지고 선조는 도원수를 김명원에서 권율로 교체하려고 하는데, 비변사에서 권율은 경기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정세를 모르며 함부로 바꿨다가 혼란스러워진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군사행정과 작전 구상에 노력하였으며, 평양성 함락이후에 경기지역과 한양탈환을 위한 병력배치와 행정은 김명원, 류성룡, 이항복이 작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이 그의 군사적 식견을 높게 평가하여 자문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철수한 후에도 교체 논의는 지속되었고, 6월에 권율이 김명원을 대신해 도원수가 된다.

이후에는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4.정유재란과 말년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병조판서로 유도대장을 겸했고, 이후 형조판서로 옮겨간다. 병조판서를 이어받은 이항복과는 당파가 달랐음에도 같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귀시키도록 건의한 것도 김명원과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이 영의정으로 올라갈 적에는 우의정으로 김명원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이후 좌의정으로 옮겨간다.

1597년 요시라의 공작으로 파직된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자 정탁, 유성룡, 심희수, 노직 등과 함께 그를 위로하였다. 같은 해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김명원과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이순식이 복직하게 된다. 이후 병조판서, 유도대장을 겸했고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가 이듬해 음력 11월 1일 죽었다.


5.당대 평가

판서 재임 중이었던 음력 7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지고 사간원에게 탄핵을 당했는데, 이때 실록을 보면 “김명원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선조는 김명원이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고생을 많이 했다며 탄핵을 기각했다.

이순신을 탄핵할 때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몇 안되는 중신이었다. 

이억기는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김명원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부침이 심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풍도가 뛰어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다.

정승에 오른 뒤에도 이룬 것은 없었으나 마음이 아름다워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 고 성품이 선량하여 남과 잘 지냈고 풍의가 온아하여 그의 인품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6.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김명원

임진왜란 당시 패전과 신각의 죽음에 대해서 김명원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김명원을 지휘관으로 맡긴 선조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김명원은 행정가였지 지휘관이 아니었다. 군사적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나, 병사를 통솔한다는 것은 이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관료들은 그의 사람됨을 높게 보지만, 병사들은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무실에 틀어 박혀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기에는 좋은 상대일지는 몰라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이라는 위기의 상황에서 다수의 병사들에게 어떤 확고한 믿음을 얻지는 못하는 전형적인 참모형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을 살리고 삼도수군 통제사로 다시 발령내라고 충언을 한 점을 보면 그의 사람됨이 나쁘지는 않았으며 군사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휘를 못할 뿐이었다.


김명원은 관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겠지만, 병사들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김명원은 정승으로서는 유능했을지는 몰라도 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다고 평가해 본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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