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의 악녀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조선 중종 2계비)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6. 2. 28. 12:52
반응형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는 조선 중종(中宗)의 제2계비로 아들 명종(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불교 부흥과 외척 세력의 대두 등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악녀의 대명사로 불리어지는 문정왕후에 대해 정리해 본다.

백성과 사대부들에게는 증오를 불교 신자들에는 존경을 받았던 조선의 악녀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생애와 평가


1. 출생 및 가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 12월 2일(음력 10월 22일) ~ 1565년 5월 5일(음력 4월 6일)) 1501년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지임은 세조의 장인 정정공 윤번의 5대손으로 고대고모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였다. 또 종고조부 윤사흔의 증손이 장경왕후와 윤임으로 이들은 문정왕후에게는 9촌 삼종고모와 삼종숙이 된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역시 그녀의 일족으로, 5대조 윤번의 사촌인 윤곤의 증손녀로, 12촌 할머니 뻘이 었다. 그녀의 아버지 윤지임은 윤필상의 11촌 조카뻘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다녀오기도 한다. 형제로는 오라비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 윤원형 등 5형제가 있다.


2.어린시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왕조실록에 의하면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고 한다. 11세에 어머니 전의 이씨의 상을 당했다. 당시 윤지임의 집안은 선대에서는 정승과 판서를 지냈으나, 부친 대부터 벼슬길이 끊기고 자녀는 많은 몰락 양반으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3. 왕비 책봉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죽고 곧이어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 운동이 제기되지면 없던 일이 되어 버리고 새 중전을 물색하게 되는데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는 파평 윤씨 일가 사람이 왕비로 간택되는 것을 원했고 9촌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가 1517년 2월 왕비로 결정되는데 당시 17세였다.


4. 후궁들과의 암투

중종은 강제로 이혼당한 신씨와 사별한 윤씨 외에도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등 문정왕후보다 더 예쁜 후궁들이 있었다. 게다가 이미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적실의 왕자와 경빈 박씨가 낳은 복성군 미, 희빈 홍씨가 낳은 봉성군 등 왕자들이 있어 중종이 왕비 윤씨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문정왕후는 공식적으로 왕비 (중전)였지만 실재로는 왕의 총애도 없고, 언제든지 자리를 뺏길 수 있는 처지였다. 특히, 복성군을 어머니 경빈 박씨는 똑똑한 아들에 자신도 한 미모하는 여인으로 게다가 한 성질하는 여인이었다. 박씨 외에도 희빈 홍씨등 후궁들과의 치열한 암투가 벌이게 되는데, 그럼에도 윤씨가 권력을 잡게 된 이유는 당시 3살 이었던 원자 호(인종)를 보호할 공식적인 어머니가 있어야 했다. 여기에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형제들의 자손이기에 요절한 장경왕후의 가까운 친척이며 원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후궁들을 견제할 수 있었고 훗날 수렴청정까지 이어지게 된다.


5. 경원대군(조선 명종) 출산

1534년 문정왕후는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오래 기다렸던 아들을 낳는다. 공식적으로 세자 호(인종)의 동생인 차남 경원대군(훗날 명종)으로 이때부터 문정왕후는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인종을 멀리하게 되는데 야사에는 온갖 학대를 했다고 하지만 정사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문정왕후는 인종과 명종을 모두 나약한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지나차게 애지중지한 점도 있지만, 간섭이 매우 심했다고 전한다. 친아들 명종이 효심 보다는 어머니를 두려워했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6. 인종 즉위 및 변사

1544년 중종이 병사하고 인종이 즉위한다. 그런데 인종은 등극 8개월 만에 의문의 변사를 당하고 사람들은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의 소행이라 의심하게 되는데 야사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이 있는데, 모진 학대로 인종을 괴롭히던 문정왕후는 모처럼 인자한 웃음을 띠며 새 왕 인종에게 아첨이나 하듯 떡을 손수 가지고 들어와 권하였고, 마음 약한 인종은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뜻에서 독이 든 그 떡을 먹고 그만 급사하고 말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종이 건강이 좋지 않았고, 무리하게 빈소를 지키다보니 병약한 체력을 이기지 못해 갑자기 죽었다고 여겨진다.


7.명종 즉위와 수렴청정

1545년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되는데, 이때부터 조선의 모든 권력을 문정왕후가 좌지우지 하게 되는데, 우선 윤원형과 윤원로를 불러들이고 이들 형제는 윤임 일파를 제거해 조정을 장악하게 되고 많은 이들이 숙청되는데 주로 사림들이었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거치면서 신료들은 문정왕후를 두려움워 하게 되고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 불교 중흥책을 시행하려는 문정왕후를 끝내 막지도 못하게 된다. 특히, 조정의 인사권을 문정왕후가 행사를 했다는 점은 가장 큰 문제였다. 친정 동생 윤원형의 권력과 남용은 문정왕후의 묵인 때문이었고 1551년 명종이 만 18세로 법적 성인이 된 뒤에도 수렴청정을 계속해 1563년까지 섭정을 계속 하게 되는데, 이때까지 조선의 실질적인 왕은 문정왕후였던 것이다.


8.최후

1553년(명종 8) 18세가 된 명종에게 형식적으로 친정(親政)을 하도록 했지만 문정왕후는 윤원형과 정사에 직접 관여 1563년까지 섭정을 하지만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종이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563년 아들 순회세자가 죽자 명종은 더욱 실의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된다.

그러던 중 문정왕후는 1565년 음력 4월 갑자기 병이 심해졌고 5월 5일(음력 4월 6일) 병석에서 유언을 남기고 그날 오후 65세로 죽는다.

사후 문정의 시호가 내려졌고 죽은 뒤 남편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려 했지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



9.사후 평가

조선 내내 조선 최악의 악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의붓아들 인종을 독살한 악후(惡后)이며 두 얼굴을 가진 여인이라는 혹평 등이 있다. 문정왕후는 권력욕이 매우 강한 여자라는 점은 분명하며 조선 명종 대의 혼란은 문정왕후가 원인이었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권세를 부리는 과정에는 명분 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웠고 자신의 일가 형제들에게 권력을 주어 조정을 부패하게 만든 책임은 분명하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간혹 문정왕후가 비판 받는 이유를 조선시대 남성우월주의 사회로 보는 시각과 불교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또 서얼허통법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 문정왕후가 대체적으로 후궁들에게 잘대해 주고, 신분과 서얼같은 것을 타파해 평동을 주장했다는 점을 들어 그녀에 대한 업적이 과소 평가되었다는 등의 옹호론도 꽤 많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라. 지금 세계에서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는 바로 북한이다. 이들도 공식적으로는 인민민주주의, 자유, 인권 등을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에 있다.

문정왕후가 집권한 명종대 임꺽정으로 대변되는 민란들이 발생한 이유는 문정왕후가 정치를 못했기 때문이다. 말과 생각이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외척정치 등으로 조선의 국정을 문란하게 만들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저 사대부들의 눈 밖에 나서 악녀가 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기에 악녀가 된 것이다. 

물론 불교신자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문정왕후로 인해 융성해진 것은 불교 뿐이었다.


문정왕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측근과 중들에게는 부처였고, 사대부에게는 악녀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저승사자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