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유일의 폐모 사건 조선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생애

올드코난 2016. 3. 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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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후궁과 자녀를 많이 둔 임금이었다. 이런 여성에 대한 편력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조선 최악의 전쟁을 겪고도 계속되었는데, 정비 의인왕후가 1600년에 세상을 뜨자 2년후 새장가를 들어 계비를 맞는데, 바로 인목왕후였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 유일의 폐모 사건의 주인공, 정치의 희생양 조선 선조(宣祖)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생애


1. 개요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는 조선 14대 인금 선조의 계비로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많이 알려졌다. 선조 때 소성(昭聖),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린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사후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와 인목(仁穆)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아버지는 연흥부원군 연안 김씨 김제남이고, 어머니는 광주 노씨였다.


2.왕비

1584년 태어나 9살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성장했는데 1600년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사망한 후 2년뒤인 1602년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당시 19세였고 선조의 나이는 51세였다. 다음해 1603년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았고, 1606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 시기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의 내부 사정도 있었지만, 선조 자신이 광해군에게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광해군의 세자 폐위를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출산은 광해군이 인목왕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만들고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됨으로 서로 원수가 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3. 선조의 죽음

선조에게 영창대군의 존재는 아주 중요했다. 방계 출신이었던 선조에게 혈통에 대한 집착은 매우컸는데, 광해군은 후궁의 자식이지만, 영창대군은 계비이기는 하지만 왕비의 아들이기에 적장자가 된다. 세자로서 명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선조의 마음을 잃은 신료들 중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주장하는 자들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고, 대립을 하는데 문제는 선조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데 있다. 영창대군이 2살이 되던 1608년 선조가 경운궁에서 57세로 죽고 만다.


4. 광해군 즉위와 폐비

선조가 죽자 영의정 유연경은 즉시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하기를 청하지만, 인목왕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광해군 즉위를 허락하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적통성 논란으로 친형이 임해군을 비롯한 선조의 다른 자식들이 자리를 넘보는데 있었다. 광해군 입장에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과한 측면도 있었는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키는데. 이는 훗날 광해군의 큰 약점이 되고 만다. 이유는 법적으로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어머니가된다. 자식이 부모를 폐비시킨 격이 되었고 조선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효를 중요시하던 조선 사대부에게는 이는 반정의 명분이 되고 만다.


5.인조반정

광해군의 집권 후반은 실정이 많았다. 폐모 사건이 명분이 되기는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조선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점과 대북파에 의한 정치의 혼란이 결국 인조반정을 부르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능양군이 16대 임금 인조가 되고 광해군은 폐주가 되는데, 폐비가 되었던 인목왕후는 이때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된다.

인목왕후는 인조에게 광해군을 죽일 것을 요청하지만, 인조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6.최후

인목왕후는 도저히 광해군을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친정과 자식을 죽인 원수였기에 광해군을 죽일 것을 수차례 인조에게 요청하지만, 문제는 인조가 즉위를 한 후 조선에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다는게 문제다. 민심이 인조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조가 광해군을 살려둔 것이다. 인목왕후는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 49세로 죽었는데, 광해군은 그녀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사후 선조와 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의 목릉(穆陵)에 묻혔다.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 생활에 대해서는 인목왕후의 궁녀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계축일기 (癸丑日記, 서궁일기)에 전해진다. 금강산 유점사에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보문경’ 일부가 남아 있다.



7.올드코난 생각

인목왕후는 생각해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19세에 51살의 노인과 혼례를 치러야 했고, 몇 년 안되어 남편 선조는 죽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아들을 잃었고 친정은 풍지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한을 인조가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인조는 광해군을 살려주었고, 결국 인목왕후는 자식과 가족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가슴에 분노와 한을 담고 세상을 떠났다.

간혹 드라마를 통해서 인목왕후가 광해군과의 대립과 분노에 대한 장면만을 기억하는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녀는 불쌍한 여인이었다. 선조의 계비만 되지 않았더라도 이런 참담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후궁과 자신이 많았는데, 흔히 방계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선조는 섹스중독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식는데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늘 젊은 여자를 탐했다는 것은 선조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해 보면 인목왕후를 비롯해 광해군 등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모든 원인은 선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조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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