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미국을 뒤흔든 코리아게이트 사건 (Koreagate 박동선 사건) 정리

올드코난 2016. 12. 1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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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의 1976년 10월 15일 보도를 통해 폭로된 코리아게이트(Koreagate)는 당시 미국을 뒤흔들었던 큰 사건이었다. 박동선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박정희 유신시대에 있었던 뇌물 사건으로 박동선이 미국 정치계 로비활동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한국에서는 언론통제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미국을 뒤흔든 국제적인 망신 박정희 정부의 부도덕성 사례, 코리아게이트 (Koreagate; 박동선 사건 朴東宣事件) 사건 정리


1. 개요

1976년에 일어난 정치 스캔들로, 코리아게이트 사건 혹은 박동선 로비사건으로 불린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국 정부에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인권문제와 함께 한미관계에 치명적인 악 영향을 준 사건이다. 박정희 정부가 박동선을 통해서 로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미국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시작하면서 한국군 현대화 계획을 위한 군사원조는 의회의 예산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하자 한국 정부는 미국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뇌물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2. 배경

당시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보완책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특별지원책이 미국 의회로부터 승인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로비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다 1975년 미국 의회에서 박정희 정부가 미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활동들이 있다고 폭로되기 시작한다. 1975년 6월 도널드 M. 프레이저 의원에 의한 하원의 한국에 대한 인권청문회에서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에서 반한파(反韓派)에 대한 인권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협박,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국 의회 국제관계위원회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1976년 워싱턴 포스터에 의해서 공개된다.


3. 워싱턴 포스터 폭로

1976년 10월 25일 워싱턴포스트 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워싱턴 거주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요원이 미국 의회의원들과 정부 관리들에게 1970년대 들어 매년 50만 달러 내지 100만 달러를 현금이나 선물 혹은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언론들은 닉슨 정권하의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워터게이트’에 빗대어 코리아게이트라고 이름 붙이며 큰 논란이 일지만 한국에서는 박정희 유신 정부가 보도통제를 했기 때문에 1976년 12월 정부가 이 사건을 발표할 때까지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4. 한미 갈등

워싱턴포스트 지 보도 이후 1976년 12월 미국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해서 미국 내 한국정보부원의 활동에 대해 제보하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에 망명한 후 미국 의회에서 증언함으로써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여기에 미 CIA의 청와대 도청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또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이 드러나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비판했고, 결정적으로 박정희가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드러나면서 한미 간의 갈등은 깊어진다.

5. 조사

1976년 미국 대선에서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대표적인 인권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해 CIA, FBI, NSA와 미국 국무부, 미국 법무부 등을 총동원 수사를 하게 한다.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다른 말로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7년 9월 1일, 미연방 대배심원은 박동선을 뇌물 제공과 선거자금 불법 제공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5일 후에는 김한조도 위증과 매수음모라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 의회와 국무부는 박동선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지만 거부하고 이에 미국이 식량차관 삭감과 미군 철수 등으로 압박하자 1977년 말 박동선이 미국으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송환에 응하고 박동선은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서 32명의 의원에게 85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하지만 박동선은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들을 모르쇠로 일관했고 미국 입장에서 한미 동맹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6. 김형욱 폭로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버림받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미 의회에서 박정희 유신정권을 고발한다. 김형욱은 코리아게이트가 터진후 1977년 6월 2일,뉴욕타임즈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했고 미국 청문회에도 나가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했던 일들을 밝혔고 회고록까지 만들어 박정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난 김형욱은 실종되고 마는데, 박정희 지시라는 충분한 의심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백악관 태스크포스 팀이 김형욱의 폭로를 바탕으로 프레이저 보고서를 만들기에 이른다.


7. 해결과정

지미 카터 대통령은 경색된 한미관계를 해결해보겠다고 정상회담을 했지만 박정희는 카터의 말을 듣지 않았고 카터는 화가 날 대로 나버렸다. 하지만, 박정희가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 시대에 개발 독재의 한계가 분명히 보일때였다. 여기에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던 시기 버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박정희는 미국과 타협을 한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 대해 박동선은 정부와 아무런 공식적인 관계가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하는 것, 정부의 위신을 보호하는 것, 한국민의 한 사람인 박동선을 보호하는 것 등을 내걸고 한미 양국은 외교 경로를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 박동선의 자유의사에 따라 미국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도록 합의한 것이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되었다.


8. 사건 종결

박동선은 1978년 2월부터 9월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미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었다. 박동선 사건은 미 의회 하원에서는 1978년 12월 29일, 상원에서는 1978년 10월 16일 각각 완전 종결되었으며, 프레이저 조사위원회도 1978년 10월 31일 그 활동을 끝냈다. 그리고 1978년 12월 31일 양국은 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미연방지방법원은 1979년 8월 16일 법무성의 요청에 따라 박동선에 대한 기소를 공식 철회함으로서 박동선 사건은 공식 종결되었다.


9. 사건 영향

포드 정권 시기에 터진 후 카터 정권까지 이어져 양국정부의 관계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촉진시켰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당시 2차 오일 쇼크 같은 경제적인 영향 등으로 수사는 다소 허무하게 끝나 버렸고 당시 냉전 체제였다는 점 등을 감안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사건이 종결된 1979년 그해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그렇게 묻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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