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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왕조 이전의 영국왕들

올드코난 2010. 6. 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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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튜터 왕조 이전의 간략한 역사]

영국은 5만전에 인류가 살았다고 하고 한다.
남쪽은 브리튼인이 북쪽에는 게르인이 살았는데 남쪽이 진보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
로마가 5세기까지 지배하였다
.
5
세기 중반부터는 앵글로색슨인이 잉글랜드지방을 점령하였고 829년까지 7왕국시대가 있었다
.
앵글로색슨왕조(827-1066)는 웨식스의 엑버드(에그베르트, 제위 827-839)가 영국을 통일하여

앵글로색슨왕조가 시작되었고 1066년 에드워드가 자손 없이 죽었다
.
에드워드(1042-1066)는 어머니 친정 노르만 공국에서 보호받고 자랐기 때문에 노르만의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영국에 침입하여 1066년부터는 노르만왕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어를 쓰고 완전히 프랑스화 된 노르만족이라 프랑스 문화가 영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노르만 왕조)
월리엄 1(1066-1087)-월리엄 2(1087-1100)-헨리 1(1100-1135)-스티븐(1135-1154)


헨리1세가 죽고, 후손이 없었다.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의 왕위 계승을 찬탈하였다.
마틸다의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이 프랑스에서 쳐들어와 스티븐은 그를 후계자로 지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가 죽고 노르만왕조는 끝나고 플란타지네트(플랜태저넷)의 혼혈 왕조를 열게된다
.

(플란타지네트왕조)
헨리 2(1154-1189)-리처드 1(사자왕, 1189-1199)-(1199-1216)-헨리 3(1216-1272)-
에드워드 1(1272-1307)-에드워드 2(1307-1327)-에드워드 3
(1327-1377)-
리처드 2(1377-1399)- 헨리 4(1399-1413)-헨리 5(1413-1422)-헨리 6
(1422-1461)-
에드워드 4(1461-1483)- 에드워드 5(1483-1484)-리처드 3(1484-1485)-튜터 왕조


헨리 4세부터는 랭커스터 왕조라고 하는데 그는 독일기사단에 있다가 돌아와 리처드 2세와 싸워 퇴위
시켰다. 1455-1485년 리처드의 요크가와 가문의 반란으로 장미 전쟁을 하였다.
1461
년 에드워드 4세부터 리처드 3세까지 요크가가 왕이 되어 요크 왕조라고도 한다
.
1485
년 여름에 랭커스터 가문의 인물로서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인 헨리 튜더가 상륙하자
,
어린 조카 에드워드를 살해하였다는 의심받은 리처드 3세는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았다
.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평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고, 헨리 튜터가 튜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

2] 잉글랜드의 튜터왕조

(1)헨리 7(1485-1509)
요크왕조의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형님이 죽고, 조카가 12살에 즉위하자 바로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요크왕조는 분열이 일어났다
.
프랑스에서 망명중인 랭커스터가의 리치먼드 백작(헨리 튜더)이 웨일스에 상륙하여 리처드 3세를 죽이고
,
헨리 7세로 1485년에 즉위하여 지루하던 30년의 장미 전쟁은 최종적으로 랭커스터가의 승리로 끝나고

튜더왕조를 열게 되었다
.

(2)헨리 8(1509-1547)
헨리 8세는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영국의 그리스도교 성공회를 만들고 자신이 수장이 되었다.
그는 1왕후(정책상 형수를 아내로) 캐서린에서 메리(피의 메리)1세를 두었고
,
2
왕후에게는 엘리자베스가 있으며, 3왕후에게는 에드워드 6세가 있다
.
캐서린은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이세벨 1세 부부 왕의 딸이다
.
(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왕비가 이모이다
.)
아들을 얻기 위하여 6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이중에 2명은 사형에 쳐하였다
.

1)에드워드 6(1547-1553)
1537
년에 태어나, 12일만에 어머니 죽었다.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으면서,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위원회가 정사를 돌보도록 칙령을 내렸다
.
외삼촌 서머싯 공작이 섭정하여 최고 권한을 행사하다가
,
1549
년 파렴치한 워릭백작(후에 노섬벌랜드 공)이 서머싯을 타도하고 정부를 좌지우지하였다
.
1553
16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

2)제인 그레이(1553, 7,10-1553, 7,19)
그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제인은 헨리 7세의 증손녀로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여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
이탈리아어에 능하여 학자 아스캄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
그의 비극은 파렴치한 시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에드워드 6세가 결핵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워릭백작은 그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왕위를 이어가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에드워드 6세가 16살의 나이로 숨지자, 왕위계승권자 장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배제하고 제인을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였다. 이에 귀족(추밀원)과 국민이 부당함을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
반대자의 지지를 받은 메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였다
.
백작과 그의 아들 그리고 며느리 제인을 런던 탑에 가두었다
.
1954
2월 그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당하였다.

3)메리 1(1553-1558)
1553
년에 제인을 가두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항상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은 에스파냐
왕녀로 아버지 헨리 8세의 형수이었다
.
아버지는 강대한 에스파냐의 도움을 바라고 형수(형님은 헨리 7)와 결혼하였다
.
헨리 8세는 그의 어머니와 이혼하려는 구실로 형수와 결혼은 '근친상간'이라는 이유를 달았다
.
교황은 이혼 할 명분이 못된다고(에스파냐의 압력도 있음) 거절하여, 로마교황과 인연을 끊고 성공회를

영국국교회로 만들게 되었다
.
메리 1세를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불린이 미워하여 동생이 시녀처럼 다루도록 하여도, 영리하고

학구적인 그녀는 잘 참아냈다
.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생아라고 시인하고 관계를 회복하여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 계승권이 인정되었다. 메리 1세는 37세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
.
처녀시절에 친척인 카알 5세와 혼담이 있었으나 과도한 지참금을 요구하여 결혼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
메리 1세는 아버지의 원한 때문인지는 모르나, 영국을 카톨릭화 하기 위하여 11살 연하의 펠레페 2세와

결혼한다고 선언하였다
.
이것은 아버지가 수도원을 폐지하여 얻은 영지를 잃어버리기 싫어하는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
의회는 못마땅하여 반대하였으나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라며 의회 결정을 거절하였다
.
결혼이 확실하여지자, 1554년 와이어트는 반란을 일으켜 런던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처형당하였다
.
결혼 후에 개혁자들의 책이나 카톨릭에 어긋난 책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지위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엄벌에 처하였다. 이단 처벌법을 부활시켜 300명을 화형에 처하고, 3년 동안 쉴새 없이 수 만 명이

교수형과 처형을 당하였다
.
그 뒤로 메리 1세는 '(Bloody Mary-피의 메리)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그렇게 악명을 날리는 그도 병들었고 2년 후에는 모든 욕망을 묻어야만 하였다
.

4)엘리자베스 1(1558-1603)
언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언니 메리 만큼이나 불행하였다.
3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 앤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후를 바꾸기 위하여, 왕후를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하였다. 그것은 정식왕후에서 태여 난 아들이어야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
그의 어머니 사건은 그녀가 사생아로 인정되어 카톨릭교도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가 정식

왕이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음모하여 시달리게 되었다
.
그녀는 서열 3번째의 왕위 계승자이기 때문에 홀대받지는 않았다
.
가정교사 밑에서 여러 학문과 프랑스어 외에 3개 국어를 능통하여 외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
그녀는 영리하였고, 신학에도 진지하게 공부하여 성공회교리를 받아 들였다
.
그녀는 잉글랜드를 성공회를 영국국교로 정하고 수장이 되었다
.
여러 나라 왕자나 왕이 결혼을 요청하면 응하는 척하면서 정치에 이용하였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
이것은 권력을 남편과 함께 나누기가 싫었고 또 위험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인색하여 종교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네덜란드에 약간의 자금과 적은 군사를 원조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위협은 카톨릭의 예수회가 그를 암살하려고 한 것과 스코트랜드의 카톨릭교도이며

사촌동생인 메리 스츄어트가 카톨릭과 음모하여 그녀를 권자에서 쫒아 내려 한것이었다
.
필립(펠레페) 2세는 언니 메리(피의 여왕)를 대신하여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청혼하였다
.
그녀는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하였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
로마교황은 그녀를 없애기 위하여 스코트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와 스페인의 합작으로 음모를 꾸몄다
.
먼저 교황은 그의 신하들이 충성하지 못하도록 파문하였다
.
당시의 영국에는 카톨릭의 신자인 평민과 귀족이 많이 있었다
.
성공회는 그들을 탄압하는 청원을 냈으나, 카톨릭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탄압청원을 물리친 것이

성공회는 불만이 되었다. 교황의 음모는 발각되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려고 한 메리 스튜어트는

반란죄로 18년간 투옥되었다가 1587년에 처형되었다
.
영국을 반란에 의한 카톨릭화를 포기하면서 무력으로 시도한 것이 무적함대의 영국침공이었다
.
1588
년 엘리자베스는 이때만은 많은 비용을 지출하여 가볍고 속도 빠른 작은 배를 많이 만든 것과

사정거리가 긴 우수한 대포를 장착한 것이 성공하여 크고 둔한 무적함대를 쉽게 물리쳐 영국은 해상권을

잡아 식민지 개척과 무역에 우위를 확보하였다
.
*드레이크에 패한 무적함대는 돌아가다가 태풍까지 만나 전부 파선하여 제기 불능이 되었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무사히 마친 영국은 국내는 산업이 눈부시게 발랄하였고, 영국인들이 인도하고도 안

바꾼다는 셰익스피어(1564-1616) 같은 사람이 나와 '리처드 3', '베니스의 상인
',
'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의 작품을 남기고 문예도 크게 발달하여 역사상 가장국력이 왕성하였다고 한다
.
후세에 이 시대를 '훌륭한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렀다
.
여왕은 수염 기르는 남자들에게 세금을 신설하여 카이젤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을 곤욕 서럽게 만들었다
.
여왕은 여성의 권위와 위엄 및 국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는 지금도 살아 남아 있다
.
1600
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영국은 이 때부터 자존심이 높은 국민이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1600)
영국이 인도 및 극동 지역과의 향료무역을 위해 1600 12 31일 여왕의 특허를 받아 설립하였다.
후에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어 무역에 무력을 동원한 착취 형태로 18-19세기 중엽까지 인도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다
.
동인도의 향료무역을 스페인,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으나 1588년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향료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회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인들과 대립하였고

포르투갈인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
1612
년 인도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격퇴하여 무굴 제국으로부터 무역특혜를 얻어냈다
.
1623
년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동인도제도에서 축출 당하였다
.
남부 인도에서 향료를 사들이고 면, 견직물염료, 초석 등을 판매해 기반을 잡아나갔고 활동범위도

페르시아 만, 동남아시아,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
엘리자베스 시대는 막대한 이익금과 진귀한 물건이 들어와 국민에게 세금의 부담을 주지 않고 국가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어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어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
18
세기 이후에는 면제품 무역은 쇠퇴하였고 대신에 중국제 차 수입이 주종이 되었다
.
차 무역의 적자를 아편 수출로 충당하다가 결국 아편전쟁(1839-42)으로 이어졌다
.
이 회사의 독점권에 반발하여 경쟁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708년 이들 2회사는 통합동인도회사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 이 회사는 점차로 무역부문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통제권을 상실해갔다
.
무역의 독점은 1813년에 끝나고 1834년부터는 인도에서 영국정부의 경영대리인 수준에 머물렀다
.
1857
년의 세포이 난 이후는 대리인 역할마저 상실하여 1873년 망하였다
.
일본도 이 회사를 흉내내어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우리 나라 및 동양 여러 나라를 식민지화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
당시에 영국은 해군력도 약하여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개척한 식민지를 차지 할 수도 없으므로
두 나라가 식민지로부터 약탈하여 오는 보석과 향료를 영국은 해적을 통하여 약탈하였다
.
해적은 국적이 없으므로 영국은 국가적 책임을 면하려고 하였다
.
그들 중에 동서양을 넘나들며 이름을 떨친 해적이 바로 프란시스 트레이크이다
.
스페인은 해적을 없애라고 엘리자베스에게 특사를 보냈으나 오히려 그를 귀족 드레이크 경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이 무적함대를 동원하여 영국을 공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그는 영국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받고 카디스에 집결한 무적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
1588
년 무적함대와 대결하여 격퇴시키고 프랑스 칼레 항에서 영국에 상륙하려는 군함과 육군 3만을

화공법으로 태워버렸다. 살아남아 도망간 배들은 폭풍을 만나 파선하였고 영국 해로에 익숙지 못한

그들은 좌초되어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하고 자멸하였다
.

3]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

(1)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스콧족의 정착지'라는 뜻이다.
스코틀랜드는 유적들은 BC 3000년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A.D
원년: 예수님이 태여 날쯤에는 다양한 혈통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
A.D 82-208:
로마의 침입이 있었으나 거점확보에는 실패하였다
.
9
세기: 겔트족이 군주국을 통합하였다
.
1057
: 맥베스의 통치시대로, 말콤 3세부터 잉글랜드 세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
1296
: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1세가 강제로 직접통치하려 한 것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
1328
: 에드워드 3세는 반란의 지도자 로버트 부루스를 로버트 1세라고 인정하여 독립하였다
.

(2) 로버트 2(1371-90)
부르스가()의 데이비드 2세가 죽고, 로버트 2(1371-90)가 즉위하였다.
로버트 1세는 큰 딸 마저리(마조리)는 스코틀랜드왕의 6대 째 시종(가신으로 관직에 해당)인 월터가와

1315
년에 결혼하여, 그사이에서 난 로버트 2세가 1371년에 왕위에 오르니, 스튜어트 월터가의 최초의

왕으로 스튜어트 왕조를 열게 되었다
.
그러나 가문은 불운하여 갑자기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 7명의 왕이 미성년으로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들의 어머니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3)로버트 3(1390-1406)
1384-88
년까지는 너무 노쇠한 아버지 로버트 2세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1388
년 그는 말()에 채여 불구가 되었으며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실권을 갖지 못하였고 동생 로버트가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는 로버트 2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뮤어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몇 년 뒤에야

부모가 결혼하는 바람에 적자가 되었다
.
1390
년 왕위에 오르고 평판이 나빴던 스코틀랜드의 왕 존 드 베일리얼(1292-96 재위)의 이름을 의식하여

자신의 이름을 존에서 로버트(뒤에 로버트 3)로 바꾸었다
.
나이든 왕은 살아남은 어린 아들 제임스를 위험한 올버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냈으나

아들이 잉글랜드 뱃사람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

(4)제임스 1(1406-37)
제임스는 국왕 로버트 3세 아들이며 상속자였다.
1406
년 로버트는 강력하고 위험한 올버니 공작의 손이 아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6살 먹은

그를 프랑스로 보내는 도중에 잉글랜드 선원에게 붙들려 런던의 궁정으로 끌려갔다
.
그후 몇 날이 되지 않아 로버트 3세는 죽고 올버니가 섭정이 되었으나 잉글랜드가 원하는 제임스의

몸값을 내지 않았다. 1420년 올버니가 죽고 아들 머닥이 1424년 제임스가 석방될 때까지 섭정하였다
.
제임스는 풀려나자마자 스코틀랜드 귀족의 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가혹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
1425
년 그는 많은 주요영주들을 잡아들이고 그중 머닥과 올버니 가문의 몇 사람은 사형시켰다
.
왕정 운영에 필요한 자원을 조달 하기 위하여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였다
.
또 관세징수의 부정을 근절하기 위하여 재무관리들을 직접 감독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
교회수익을 로마교황에게 보내지 못하게 하여 장기간 교황과 분쟁하였다
.
그는 평민들을 위해 사법행정을 개선시켜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왕위를 노린 애설 백작 월터가 이끄는

음모 단체에 의해 암살되었다
.
그는 상당히 교양 있는 사람으로 자국어로 '왕의 책(The Kingis Quair)'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
실제 재위기간(1424-37)에 가장 강력한 군주제를 스코틀랜드에 구축하였다
.

(5)제임스 2(1437-60)
제임스 1세의 아들 중 유일한 그는 아버지가 암살되자(1437. 2)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너무 어려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임스 1세가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은 무너졌다
.
크라이턴, 리빙스턴, 더글러스 3가문이 어린 왕을 조종하기 위해 싸웠다
.
제임스는 1449년 메리와 결혼한 뒤 왕의 소임을 감당하면서 제일 먼저한 일은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리빙스턴 가문의 영지를 압수하였다
.
1452
년 그는 더글러스 백작을 칼로 찔러 죽이고 3년 후에는 더글러스 가문의 성을 파괴하였고 그들의

방대한 영지를 몰수하여 나온 소득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우고 사법행정을 개선할 수 있었다
.
그는 1456년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주장하는 잉글랜드 전초기지인 록스버러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1460
년 전사하였다
.
그는 지나치게
*골프가 성행하여 전쟁에 필요한 궁술 훈련을 게을리하여 국방적 견지에서 문제가 된다고
보아 1457년 그는 제14회 의회에서 골프금지법령을 제정하였다.

*골프(golf) 이야기
로마 시대에 깃털을 넣은 가죽 볼을 끝이 둥근 막대기로 쳐서 날려보내는 '파가니카'라는 게임이 있었다.
이 게임을 골프의 원조라고 하나, 정설로는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들에서 돌을 막대기로 쳐서 토끼 굴에

넣는 게임을 즐긴 것을 골프의 시작으로 보고있다
.
1457
년 제임스 2세는 국민들이 궁술훈련을 등한시한다고 하여 금지시켰으나 15세기말부터 화약의

발명으로 궁술의 중요성이 사라져 골프금지령도 폐지되었으며 특히 16세기에는 왕실에서 골프 붐이

더욱 거세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잉글랜드의 귀족과 골프를 겨루어 승리를 거두었다고도 한다.
또한 그의 딸인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육군사관후보생(이름 밀리터리 캐디트)에게 클럽을 메게하고

세인트앤드루스의 코스를 걸어다녔다고 한다
.
여왕의 클럽을 메고 다녔던 육군사관후보생의 이름 밀리터리 캐디트에서 '캐디'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
한편 이 당시의 경기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링크스'라고 하는 모래땅 코스에서 진행되었다
.
세계 최초의 골프장은 1754년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의 개장이다
.
1860
년 제 1회 전 영국오픈 골프대회가 개최되면서 전세계로 퍼지게되었다
.
우리나라에 골프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00년에 정부의 세관원으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원산의

세관 내에 6홀의 경기장을 만들어 경기를 한 것이 기록에 나온다
.
우리나라 골프사에 있어서 영친왕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그는 서울시 성동구 능동에 위치한 군자리(서울 컨트리클럽:지금의 어린이대공원) 땅을 18홀 코스의

경기장으로 만들게 하여 1929년에 개장하였다. 일본은 1년 늦게 1901년에 시작되었다
.
골프는 중독성이 강하여 중독 된 사람을 '골퍼 홀릭'이라고 한다
.
중독성을 가리는 방법은 거실을 퍼팅연습장으로 생각하거나 부인한테 '골프를 나보다 더 사랑한다'

말을 듣거나, 또는 새벽 일찍이 눈보라 치거나 비바람이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프장을 찾는 사람들이

중독자이다
.
직경 10.8cm의 홀 컵에 공을 넣는 일이 잘 될 듯 하면서도 뜻대로 안 되는 것이 골프의 묘미라고 한다
.
프로 골퍼 해럴드 힐튼이 말하기를 '위기는 대체로 제 3라운드'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제임스 3(1460-88)
나약한 군주였고 귀족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여 큰 반란을 겪었다.
부왕 제임스 2세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
1469
년 제임스는 보이드 가문을 전복시키고 혼자 힘으로 통치를 시작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정부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
불만에 찬 그의 신하들이 1488년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15세 된 아들을 제임스 4세로 옹립하였다
.
그는 6 11일 스털링의 서치번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 죽었다
.

(7)제임스 4(1488-1513)
정열적이고 인기 있는 통치자였으며 나라를 통합하고 왕실재정을 굳건하게 하여 유럽의 정치판도에서
스코틀랜드의 위상을 높였다. 1493년에는 아일랜드의 영주 세력까지 모두 제압하였다
.
그는 재위 기간동안에 잉글랜드 국경지방을 공격하여 평화를 깼다
.
1503
년 그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7세의 맏딸인 마거릿 튜더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 결혼으로 1세기 후에 그의 증손자인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왕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통일 영국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
제임스 4세의 위신은 높아갔으나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충돌하여 약화되었다
.
1512
년 잉글랜드와 유럽의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
1513
년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였을 때 그는 프랑스를 돕기 위하여 잉글랜드로 진군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5세로 즉위하였다
.
그는 르네상스 시대 군주의 이상형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궁정을 품위와 교양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문학을 후원하여 인쇄업자들에게 사업 허가를 내주고 교육의 질을 향상시켰다
.

(8)제임스 5(1513-42)
그는 생후 17개월에 부왕인 제임스 4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1524
년 앵거스는 그를 1526년부터 연금시켰다
.
그는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탈출하여 앵거스를 잉글랜드로 몰아냈다
.
1534
년에는 외숙부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와 조약을 맺었다
.
그러나 1538년 프랑스의 귀족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하여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는 잉글랜드와

대립관계에 놓였다
.
1542
년 헨리 8세의 군대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배반으로 무력해진

그의 소규모 군대는 힘없이 크게 패배하였고 이것은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였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
그의 딸이며 적자 중 유일한 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태어난 지 1주일 만인

1542
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자들 중에는 메리 스튜어트가 156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포기했을 때 섭정이 된 머리 백작 제임스(1570 죽음)가 있다.

(9)메리 스튜어트(1542-1567)
그녀는 엘리자베스(5) 고모 되는 마거릿 튜더의 손녀로 태어나자마자 여왕이 되었고,
5
세가 되는 해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어머니가 기즈의 가문이라 프랑스궁전에서 생활하며

앙리 2세와 카드린 드 메데치와 함께 생활하며 프랑스의 여인으로 자랐다
.
그녀의 키는180cm에 날씬한 몸매에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사냥과 무도회에서는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
음악과 시에도 능한 그녀가 1558(16)년 앙리 2세의 장남 프랑수아(1544, 14)와 결혼 할 때 모습은

르네상스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모두 지녔다
.
그녀는 신방은 차리지 못하였지만 어린 신랑을 사랑하였다
.
1558
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카톨릭교도들과 시아버지 앙리 2세는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임으로, 그녀가 정통 왕위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영국으로 가서 왕위에 올을 것을 권하였다
.
1559
년 앙리 2세 죽음으로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여 그녀는 프랑스왕비와 스코틀랜드 여왕을

겸하였고 프랑스와 합병되었다. 1560년 남편의 죽음으로 18세에 과부가 되었다.
1561
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 왔으나, 스코틀랜드는 존 녹스의 종교개혁이 완성 된 상태이므로
,
프랑스 여인으로 카톨릭의 신자인 그녀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
그녀는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 22살 때 미남인 단리백작(헨리 스튜어트)에게 무분별하게 2번째

결혼하였고, 비서이자 이탈리아의 음악가 리치오(라지오)와 사랑에 빠졌다
.
단리백작은 리치오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살인하였다
.
또 단리가 자신도 죽일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
단리백작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태어났으나 아이는 리치오의 아들로 의심하여 사이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
아이가 8개월 되는 해에 단리백작은 휴양지에서 집이 폭파되어 죽었는데, 그녀의 소행으로 여겼다
.
한편 단리백작이 야심가이기 때문에 또 다른 야심가 보스웰에게 살해된 것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보스웰이 단리의 살인자로 의심받고 있을 때에 보스웰은 그녀를 강제로 강탈하였고, 또 한 그녀는 24세에 보스웰과 3번째 결혼하였다
.
1567
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군대가 쫓겨나면서 그녀도 강제로 퇴위 당하였다
.
2
번째 남편 단리백작에서 얻은 1살 된 아들이 제임스 6세로 왕위에 오르고, 그녀는 작은 섬에 유폐되었다
.
그녀의 추종자들이 반란에 실패하였고, 그녀도 잡혀 투옥되었으나 탈출하여 친척인 잉글랜드로 도망가

엘리자베스의 보호를 받았다
.
1567
년 보스웰과 결별하였고 보스웰도 추방되어 투옥되었다가 1578년에 죽었다
.
엘리자베스는 그녀와 카톨릭의 음모가 발각되어 18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
교황과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영국을 점령하면 그녀로 왕위를 이어가게 하려고 하였다
.
한편 그녀를 반대하는 대신들이 그녀를 제거하려는 음모을 하여 그녀를 함정에 빠지게 하였다
.
대신들은 허위로 그녀를 위한 모반이 준비 중이며 그녀도 찬성한다는 답장을 받아냈다
.
그녀는 반역죄로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1587 45세로 처형당하였다
.
그녀는 당대에 미모와 음란한 생활은 지탄받았으나, 후에 미와 지혜는 동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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