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16

올드코난 2010. 7. 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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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밤이 초경이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석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옳지. 이제 때가 왔구나."

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여 덜덜 떨고 있었다. 이 때 문 밖에서,

  "창수, 어느 방에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방이요."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아이구,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구,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못 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고, 김창수 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김창수에게 전지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진년 윤

8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리하였다.

  법무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에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 회의를 여시와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위에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 서른 두 물상객주들이 통문을 돌려서 매호에 한 사람 이상

우각동으로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모아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 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 주고 끝으로,

  "아무러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하고 갔다.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이 날리다가

춘풍이 부는 것과 같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 방망이로 착고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바지저고리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구 하고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죄수들은 내가 그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꼬지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대군주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자 전일에 와서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 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내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위에서 소명이 내려서 내가 영귀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을

병마우후 김주경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별 말이 없고 다만,

  "고생이나 잘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하고는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우후가 아버지를 찾아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에 보태라고 돈 2백 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한다. 이 말 끝에 어머니는,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하시기로 나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하였다.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반수로 있는 최덕만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의 집 비부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천 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두루 포루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 고지기(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한 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고방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 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여러 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만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하여서 수십 만 냥의 돈을 땄다.

  김주경은 그렇게 투전하여 얻은 돈으로 강화와 인천의 각 관청의 관속을 매수하여

그의 지휘에 복종케 하고, 또 꾀있고 용맹있는 날탕패를 많이 모아 제 식구를 만들어

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의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꼭 혼을 내고야 말았다. 경내에 도적이 나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오더라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잡아가라면 잡아 가고, 그에게 맡기고

가라면 포교들은 거역을 못 하였다. 당시에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으니 양반에는

이건창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강화유수도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대원군은 이런 말을 듣고 김주경에게 군량을 맡는 중임을 맡긴 것이다.

  하루는 사령반수 최덕만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김주경이가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김창수를 살려 내야 할 터인데, 요새 정부의

대관놈들이 모두 눈깔에 동록이 슬어서 돈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번에

집에 가서 가산을 모두 족쳐 팔아 가지고 김창수의 부모 중에 한 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석방운동을 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최덕만이 이 말을

한 지 10여 일 후에 과연 김주경이가 인천에 와서 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갔다.

  뒤에 듣건대 김주경은 첫째로 당시 법무대신 한규설을 찾아서 내 말을 하고, 이런

사람을 살려 내어야 충의지사가 많이 나올 터이니, 폐하께 입주하여 나를 놓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규설도 내심으로는 찬성이나, 일본공사 임권조가 벌써 김창수를

아니 죽였다는 것을 문제 삼아서 대신 중에 누구든지 김창수를 옹호하는 자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해치려 하니, 막무가내 하라고 폐하께 입주하는 일을 거절하므로

김주경은 분개하여 대관들을 무수히 졸욕하고 나와서 공식으로 법부에 김창수 석방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렸더니 그 제사에

 

  '(기의가상 사관중대 미가천편향사)

  그 의는 가상하나 일이 중대하니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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