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이 감리사가 나를 심문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나 김창수는 하향 일개 천생이건마는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은
잊어버리고 한갖 영귀와 총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감리사 이재정, 경무관 김윤정,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모두 찔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 말이 다 끝난 뒤에도 한참 잠자코 있던 이 감리사가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은 어성으로,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참괴한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 하고 경어를 쓴다. 이때에 김윤정이 내 병이 아직 위험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이 감리사에게 수군수군하더니, 옥사정을 명하여 나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내가 옥사정의 등에 업혀 나가노라니 많은 군중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희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마 군중이나
관속들에게서 내가 관정에서 한 일을 듣고 약간 안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말씀이거니와 그날 내가 심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어머니는 옥문밖에 와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업혀 나오는 꼴을 보시고 '저것이
병중에 정신없이 잘못 대답하다가 당장에 맞아 죽지나 않나'하고 무척 근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감리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는
둥, 내가 일본 순사를 호령하여 내어 쫓았다는 둥, 김창수는 해주 사는 소년인데 민
중전마마의 원수를 갚노라고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셨다고
하셨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마나님, 아무 걱정 마시오.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감방에 돌아오는 길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나를 전과 같이 다른 도적과
함께 착고를 채워 두는데 대하여 나는 크게 분개하여 벽력 같은 소리로,
"내가 아무 의사도 발표하기 전에는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마는 이왕 내가 할 말을 다한 오늘날에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 놓고 이것이 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 하면서 어떻게나 내가 몸을
요동하였던지 한 착고 구멍에 발목을 넣고 있는 여덟 명 죄수가 말을 더 보태어서,
내가 한 다리로 착고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자기네 발목이 다 부러졌노라고
떠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경무관 김윤정이 들어 와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거든 왜 도적 죄수와 같이 둔 단 말이냐. 즉각으로 이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기고 일체 몸은 구속치 말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렷다."
하고 옥사정을 한끝 책망하고 한끝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그런 지 얼마 아니하여서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말씀이, 아까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일 백 쉰 냥(30원)을 보내며 내게 보약을 사 먹이라
하였다 하며, 어머니께서 우거하시는 집주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
손님들까지도 매우 나를 존경하여서,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엇을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해 드리리다." 하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홉 사람의 발목을 넣은 큰 착고를 한 발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이 화보를
여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가 잡혀 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살인한 죄인을
놓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밥 일곱 그릇 먹고 하루 7백리 가는 장사를 어떻게
결박을 지우느냐고 변명하던 그의 말이 오늘에야 증명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는 내게 면회를 구하는 사람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의 수백 명 관속들이 내게 대한 선전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에서 세력
있는 사람 중에도, 또 말벌이꾼 중에도 다음 번 내 심문날에는 미리 알려 달라고 아는
관속들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둘째 심문날에도 나는 전번과 같이 압뢰의 등에 업혀서 나갔는데, 옥문밖에
나서면서 둘러보니 길에는 사람이 가득찼고 경무청에는 각 관아의 관리와 항내의
유력자들이 모인 모양이요, 담장이나 지붕이나 내가 심문을 받을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정내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김윤정은 지금은 경기도 참여관이라는 왜의 벼슬을 하고 있으나 그때에 나는
그가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었다. 설마 관청을 연극장으로 알고 나를 한
배우로 삼아서 구경거리를 만든 것일 리는 없으니, 필시 항심없는 무리의 일이라
그때에는 참으로 의기가 생겼다가 날이 감에 따라서 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나는 할 말은 전번에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마디로
끝내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 보고 있는 와다베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더욱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잘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그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는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 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 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제 3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지에 이름을 두었다. 이날은 일인이 없었다.
수일 후에 일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은 내 귀에 들리라고,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한다.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인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필경은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은 허할 수 없으니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 달라고 요구한데 대하여 김윤정은,
"이 사람은 계하죄인(임금이 친히 알아 하시는 죄인이라는 뜻)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대일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
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 놓고 사진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윤정은,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형구를 폐하였소."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귀국 감옥 죄수를 본즉 다 쇠사슬을 차고 다니는데..."
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이에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은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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