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진년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아니 보이고 다만 소리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위 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에게도 안 들릴 만한 입 안의 말씀으로,
"애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하시며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셨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마는 더욱 자신있게,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결심을 버리시고,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가 같이 죽자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셨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물결소리만 들렸다.
나는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된 것은, 갑오경장에 외국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내가 들어 있는 감옥은 내리에 있었다. 마루터기에 감리서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2층
문루가 있었다. 높이 둘러쌓은 담 안에 나지막한 건물이 옥인데, 이것을 반으로 갈라서
한 편에는 징역하는 전중이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큰 죄를 지은 미결수를 가두고
다른 편에는 잡수를 수용하였다. 미결수는 평복이지마는 징역하는 죄수들은 퍼런 옷을
입었고 저고리 등에는 강도, 살인, 절도, 이 모양으로 먹으로 죄명을 썼다. 이 죄수들이
일하러 옥 밖에 끌려 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를 아울러 쇠사슬로 동여서 이런 것을
둘씩둘씩 한 쇠사슬에 잡아매어 짝패를 만들고, 쇠사슬 끝 매듭이 죄수의 등에 가게
하였는데 여기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렇게 한 죄수들을 압뢰(간수)가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처음 인천옥에 갇힐 때에 나는 도적으로 취급되어서 아홉 사람을 함께 채우는
기다란 착고에 다른 도적 여덟 명의 한복판에 발목을 잠궜다. 한 달 전에 잡혀왔다는
치하포 주인이 화보가 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날 내가
토전양량을 죽인 이유를 써서 이 화보의 집 벽에 붙인 것을 일인이 떼어서 감추고
나를 완전히 강도로 몬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옥문 밖까지 따라오셔서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신 것을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서 뵈었다.
어머니는 향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참선이 능하시므로
감리서 삼문 밖 개성 사람 박 영문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그 집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셨다. 이 집은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객주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한 것이었다. 하루는 옥사정이 나를 불러서
어머니도 의접할 곳을 얻으시었고 밥도 하루 삼시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다른 죄수들이 퍽 나를 부러워하였다. 나는 옛 사람이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기은 호천망극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고생하심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이 없음이 슬프도다.'
이라 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천겹 만겹의 고생을 하셨다. 불경에, 부모와 자식은 천천생의 은애의
인연이란 말이 진실로 허사가 아니다.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한 번은 나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다른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진 동안의 일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고향으로 가서
내가 평소에 친애하던 재종제 창학(지금은 태운)과 놀았다.
'고원장재목 혼거불수초
오랜 세월 고향을 눈 앞에 그리며 지내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이미 가
있구나.'
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는 죄수들이 죽겠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은 것을 걱정하여 그자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인사불성 중에 내가 몹시
요동을 하여서 착고가 흔들려서 그자들의 발목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지켜서 내가 자살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나 자신도
병에 죽거나 원수가 나를 죽여서 죽는 것은 무가내하라 하더라도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일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땀은 났으나 보름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어보지 못하여서 기운이
탈진하여 갱신을 못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생각하였다. 해주에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겪으면서도 함구불언한 뜻은
내부에 가서 대관들을 대하여 한 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마는, 이제는 불행히 병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도적문초하는 형구가
삼엄하게 벌여 놓인 것을 보았다. 옥사정이 업어다가 내려놓은 내 꼴을 보고 경무관
김윤정은 어찌하여 내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옥사정은 열병을 앓아서
그리 되었다고 아뢰었다.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느냐?"하고 묻기로 나는,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즉 김 경무관은 술을 들이라 하여 물 대신에 술을 먹여 주었다.
김 경무관은 청상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있소."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 일인을 왜 죽였어? 그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
하고 경무관이 묻는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건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한 명을 때려 죽인 사실은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일은 없소."
하였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 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하였다.
옆 의자에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던 일본 순사(뒤에 들으니
와다나베라고 한다)가 심문 벽두에 정내의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보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하여,
"이놈!"
하는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었더니 와다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하여졌다.
배석하였던, 총순인지 주사인지 분명치 아니하나, 어떤 관원이 경무관 김윤정에게 이
사건이 심히 중대하니 감리 영감께 아뢰어 친히 심문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진언하니, 김 경무관이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윽고 감리사 이재정이
들어와서 경무관이 물러난 주석에 앉고 경무관은 이 감리사에게 지금까지의 심문
경과를 보고한다. 정내에 있는 관속들은 상관의 분부가 없이 내게 물을 갖다가
먹여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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