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15

올드코난 2010. 7. 1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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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왜놈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 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

하고 나는 고함을 하였다.

  와나다베놈이 내 곁에 와서,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

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인다.

  "나는 벼슬을 못 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의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고 나는 와다나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 화보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더니 이 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서 좋아라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다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의외에

여기서 내 20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주미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 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창수와 같은 의기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구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갖 배외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하여 나를 일깨워 줄 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 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수불석권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셨다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서양이란 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 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 몇 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진사가 서양 학문을 공부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내가 청계동에 있을 때에는 고 선생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 척양척왜를 나의 유일한

천직으로 알았고, 옳은 도가 한 줄기 살아 있는 데는 오직 우리 나라 뿐이요, 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무리들은 모두 금수와 같은 오랑캐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권만 보아도 저 눈이 움푹 들어 가고 코가 우뚝 솟은 사람들이 결코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오랑캐가 아니요, 오히려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저 큰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신선과

같은 우리 탐관오리야말로 오랑캐의 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에 우리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가 짝이  없어서 이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 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곧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 보려 하였다. 죄수는 들락날락하는 자를 아울러 평균 백

명 가량인데 그 열에 아홉까지는 양서부지였다. 내가 글을 가르쳐 주마 한즉 그들은

마다고는 아니하고 배우는 체를 하였으나 그 중에 몇 사람을 제하고는 글에 뜻이 있는

것보다 내 눈에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도적이나

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글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조덕근이란 자는 "대학"을 배우기로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인생팔세 개입소학'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이 읽다가, '개입소학'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여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 자는 화개동 갈보의 서방으로서 갈보 하나를 중국으로 팔아

보낸 죄로 10년 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때는 건양 2년 즈음이라, '황성신문'

창간되었다 하여 누가 내게 들여 주는 어느 날 신문에, 내 사건의 전말을 대강 적고

나서 김창수가 인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죄수의 선생 노릇을 하는 한편, 또 대서소도 벌인 셈이 되었다. 억울하게 잡혀

온 죄수의 말을 듣고 내가 소장을 써주면 그것으로 놓여 나가는 이도 있어서 내 소장

대서가 소문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밖에 있는 대서인에게 소장을

써달래려면 매우 힘도 들고 돈도 들었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마주 앉아서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 소장을 쓰는 것은 인찰지 사는 값밖에는 도무지 비용이 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소장을 쓰면 꼭 득송한다고 사람들이 헛소문을 내어서 관리 중에

내게 소장을 지어달라는 자도 있고, 어느 관원에게 돈을 빼앗겼다 하는 사람의 원정을

지어서 상관에게 드려 그 관리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므로 옥리들도 나를

꺼려서 죄수를 함무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글을 가르치고, 대서를 한 여가에 나는 죄수들에게 소리를 시키고 나도

소리를 배우고 놀았다. 나는 농촌 생장이지마는 기음 노래 한 가락, 갈까보다 한

마디도 할 줄을 몰랐다.

  그때 옥의 규칙이 지금과는 달라서 낮잠을 재우고 밤에는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죄수가 도망할 것을 염려함에서였다.

그러므로 죄수들은 밤새도록 소리도 하고 이야기 책도 읽기를 허하였던 것이다.

규칙은 내게는 적용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므로 나도 자연 늦도록

놀다가 자게 되었다. 자꾸 듣는 동안에 자연 시조니 타령이니 남이 하는 소리의 맛을

알게 되어서 나도 배울 생각이 났다. 나는 갈보 서방 조덕근에게 평시조, 엮음시조,

남창 지름, 여창 지름, 적벽가, 새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남들이 할 때면 나도

한몫 들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 죄인, 강도 죄인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목을 달아 죽임)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7월 스무 이렛날이든가

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부러 태연한 태도를 꾸밀 법도 하지마는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아니하였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을 겨우 반 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고

선생께 들은 말씀 중에 박태보가 보습으로 단근질을 받을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한 것이며, 심양에 잡혀 갔던 심학사의 사적을 들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형을 당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은 뒤를 이어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테면 조상이다. 아무 나으리, 아무 영감 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김 석사, 살아 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더니 이것이 웬일이요?"

하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밥을 손수 들고 오시는 어머니가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내게 죽게 되었다는 말을 아니 알려 드린 것인가 하였다.

  나는 조상하는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여느 때처럼 "대학"을 읽고 있었다. 인천 감옥

죄수의 사형 집행은 언제나 오후에 하게 되었고, 처소는 우각동이란 것을 알므로 나는

아침과 점심을 잘 먹었다.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하리라 하는 마음 준비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러하지도 아니하건마는 다른 죄수들이 나를 위하여 슬퍼해

주는 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게 음식을 얻어 먹은 죄수들이며 글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나한테 소장을 써 받고 소사에 대한 지도를 받아 오던 잡수들이

애통하는 양은 그들이 제 부모상에 그러하였을까 의심할 만큼 간절하였다.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 때가 되었다.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각이

바싹바싹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다. 나는 예기하지 아니하였던 저녁 한 때를 이 세상에서 더 먹은

것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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