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12

올드코난 2010. 7. 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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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복장을

차니 그는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선언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쳐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어떤 이는,

  "장군님, 살려줍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이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가 감히 방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밖에

꿇어앉아서,

  "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 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 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

줍소서."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다. 내가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의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 달라고 빌었다.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이란 자요, 엽전 8백 냥이

짐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 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주인 이 선달을 매우 능간하게 일변 세수 제구를 들이고, 일변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상 하나에는 국수와 찬수를 놓아서 들였다. 나는 세수를 하여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밥상을 당기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지가

10분밖에 안되었지마는 과격한 운동을 한 탓으로 한두 그릇은 더 먹을 법하여도 일곱

그릇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을 거짓말로 돌리기도 창피하여서

양푼을 하나 올리라 하여 양푼에 밥과 식찬을 한데 쏟아 비비고 숟가락을 하나 더

청하여 두 숟가락을 포개어 가지고 한 숟가락 밥이 사발통만 하도록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떠서 두어 그릇 턱이나 먹은 뒤에 숟가락을 던지고 혼잣말로,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고."

  하고 시치미를 뗐다.

  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 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 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 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 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저곳에서

치하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

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 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이나 지나서 병신년 5월 열 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사랑문을 여시고,

  "이애,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 싸누나."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네가 김창수냐?"

  하고 덤벼든다.

  나는,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을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한즉 그제야 그 중의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웠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 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

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이웃 동네 강씨, 이씨네

사람들을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 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 들어가서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하는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딱 잡아떼었다.

  감사가 어성을 높여서,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이봐라, 저놈을 단단히

다루렷다."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이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두 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한 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틀었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은 그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말을

물었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민의 체포장을 보온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다시 내려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 초승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으로부터 4, 5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집물을 모두 방매하여 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 대로 따라

가셔서 하회에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로 가는 길에 읍에서

5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먹으며 다리 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라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 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원을 곁에 모시면서 말을 받아 내리고 올리고 하는 천한 구실)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 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 놓고 계절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파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며 큰 비가

퍼부어 메운 흙을 씻어 내고야 만다고 한다.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이 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

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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