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가끔 안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 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그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제2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훗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2. 기구한 젊은 때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하려고 안진사 댁 사랑에를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여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은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 9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 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 보자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불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 여비를
만들어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만주)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아장수로 차리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장이한테 까닭 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 신이
회음에서 어떤 젊은놈에게 봉변 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에서 이태조가 말갈을 쳐 물린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남대천 나무 다리와 네 가지 큰 것 중에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장승은 두 개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
있었다. 옛날에 장승은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 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가장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함흥의 낙민루는 이 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흥원, 신포에서는 명태잡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가 모두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흥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서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 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과연 문향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도청이란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꼬기, 신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칠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터와 같았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붓껍질을
흙덩이로 눌러 놓으면 거기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한다고 한다.
붓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붓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혜산진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는 압록강도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월설색산백두이운무
만고유성수압록이흉용
눈쌓인 6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용솟음친다.'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주,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땅인 마울산에 다다랐다.
지나 온 길을 무비 험산준령이요, 어떤 곳은 7, 80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데가 많았다. 나무는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 8인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한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서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서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가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었다.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워하여 얼마든지 묵여 보내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있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호 밖에 없었다.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라는 영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 리에 두어 사람이나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은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로 갔다.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 관사와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백 호라는데 그
중에는 우리 나라 사람의 집도 하나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에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를 배워
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어 피를 빨아 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어떤 곳에를 가노라니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입은 처녀가 있기에 이웃 사람에게 물어본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 임강,
환인,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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