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 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재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최고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내 부대에 산 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따라 오라 하고 나는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감역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 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십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혼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진사를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였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온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로 접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났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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