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7

올드코난 2010. 7. 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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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 막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나서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에서는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선 평생에 처음 입어 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

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안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며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령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이라는 안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은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 주시니 감사하외다."

  하고 다시,

  "들으니 구경하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 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 5개월이었지만, 그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 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있게 읊어 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때에 안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 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내게 자기의 사랑에

놀러 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우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라는 글구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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