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9

올드코난 2010. 7. 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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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어디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였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에서 배로 물을 거슬러 올라와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포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워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 와서 본국 이야기를 돌려 달라고 졸랐다. 대부분이 청일전쟁 때

피난간 사람들이지만 간혹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포흠한 관속도 있었다.

  집안의 광개토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거니와, 관전(?)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삼국충신임경업지비'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자사에게 말 한 필과 "삼국지"한 벌을

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 장렬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이나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 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하루는 압록강을 거의 백 리나 격한 노중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청국 군인의 모자)에는

옥로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덮어놓고 그의 말 머리를 잡았다. 그는

말에서 내렸다. 나는 중국말을 몰랐으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받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통피왜적여아불공대천지수)

  왜적과는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다.'

 

  라는 구절을 가르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내가 필담을 하기 위해 필통을

꺼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 왜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날에 왜가 우리 국모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토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서 전사한 청국

장수, 서옥생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가본즉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요, 집에는 1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천 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백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 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이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소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나는 근 일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 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집저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 가며 서와 작별한 지

5,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에 다다랐다.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백 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다.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니 김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김이언은 자기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약 3백명 가량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고 몸이 온통 강 속으로 빠져

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지를 뿐이었다.

소리를 들을 동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자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불의로 강계를 덮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고산전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

빙판으로 적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남쪽

송림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는 화송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 명이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 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직한

말일는지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여기 대하여서도 작전계획에

김이언은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도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교들이 그들의 진지로 돌아갈 때쯤 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탕탕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편의 천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인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큼직한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젯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어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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