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무장투쟁 개입 시작

올드코난 2015. 2. 1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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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의 혼란 속에 북베트남이 개입을 시작한다. 북베트남이 1960년 이전에 남베트남 무장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많이 다르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10회: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무장투쟁 개입 시작


1.무장 투쟁에 반대했다는 주장

케인과 루이스는 “미국의 정책적 가정과는 달리 모든 유용한 증거들로 볼 때 1958년 남베트남의 무장투쟁은 하노이의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남베트남에서 발생한 사이공 정부에 대항한 무력 활동의 지도자들은 하노이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하노이는 무장투쟁에 반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아서 쉬레징거 주니어 역시 “1960년 9월 이전까지 북베트남의 공산당은 미 제국주의로부터 남부를 해방하겠다는 천명을 하지 않았다”고 파악하고 있다.


2.직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입장

제프리 레이스는 겉으로 보기에만 아닌 척 한 것일 뿐이지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라며 공산당 탈주자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앙쩡구안(Ang Cheng Guan)은 1960년 당시 민족해방전선이 독자적으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고 북베트남이 이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민족해방전선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라는 북베트남의 선전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1956년 3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레주언(Lê Duẩn)은 하노이의 정치국에 “남부로 가는 길”이란 제목의 무장 투쟁계획을 보냈다. 이 계획에 대해 소련과 중국은 모두 반대하였고, 레주언의 계획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제임스 올슨과 랜디 로버츠는 《어디에서 도미노가 무너졌는가:미국과 베트남 1945년 - 1995년》(Where the Domino Fell: America and Vietnam 1945-1995)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이 1956년 12월 시험적인 무장 투쟁 지원을 승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공식적으로는 무장투쟁에 반대를 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남베트남에 개입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실제 북베트남 군은 호찌민 루트를 통해 병력을 이동시킨다.



3.북베트남의 개입 과정

1959년 1월 베트남 공산당은 하노이에서 제15차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전체회의는 결의를 통해 “남베트남에서 혁명 발전의 근본적인 길은 무장투쟁의 길이다”라고 표명하였지만, 정치투쟁을 통한 승리의 희망도 버리지는 않았다. 호찌민은 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일 무장 투쟁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베트남 공산당은 레주언을 제1서기로 선출하였으며〈결의안 15〉를 통해 남베트남의 무장 투쟁을 “인민 전쟁”으로 규정하고, 5월부터 호찌민 통로의 정비와 향상을 위한 559 단(Đoàn 559)을 발족하였다. 559단은 6개월에 걸쳐 라오스 산악지역에 통로를 개척하였다. 

호찌민 통로가 정비된 첫 해에 500여명의 “재편성” 인원이 남부로 향했다. 호찌민 루트를 통한 군대의 첫 이동은 1959년 8월에 있었다.

북베트남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만명의 병력을 라오스로 보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나는 호찌민 통로를 만들었다. 약 4만여명의 병력이 1961년에서 1963년까지 이 통로를 통해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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