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대공세(舊正攻勢, 베트남어: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 Tet Offensive) 또는 테트 공세는 1968년 1월 30일 밤부터 전개 된 베트남 인민군(NVA)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베트콩)의 대공세로 초반에는 베트콩이 미군과 남베트남의 주요 시설을 빠른 시간 내에 점령했지만, 곧장 미군과 남베트남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내 존속했던 베트콩이 궤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국제 여론이 반전 여론으로 쏠리면서, 북베트남에게 전술적 승리 대신 전략적 승리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승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14회: 북베트남의 전략적 승리, 베트남전의 전환점 구정 대공세 (舊正攻勢, Tet Offensive)
1. 전투의 시작
웨스트모어랜드의 미군이 꽝찌 성에서 케산 전투를 벌이느라 베트남 중부 내륙으로 이동한 사이, 1968년 1월 30일 새벽 베트남 인민군이 베트남 국군이 구정이라는 이유로 방심한 사이를 틈 타 남베트남 전역에 공격을 퍼부었다.
베트남 인민군은 남베트남을 전면에서 공격하는 한편, 베트콩은 주요 도시들을 습격하여,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미국을 포함한 반공 지원국의 군사 기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 한 곳인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자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된다.
2.전투 진행 상황
미국 대사관을 습격한 베트콩 부대는 결사의 각오로 작전에 임하였고 그들의 군사적 사기는 매우 높았다. 또한, 베트남 인민군은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습격했지만, 남베트남 국군 측의 방어가 성공하면서 실패한다.
테트 공세에 대해 처음은 베트남 인민공화국(북베트남) 군사령부에서 반대를 했지만, 북베트남 공산당 수뇌부 측에서는 남베트남에 종속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역할을 강조할 것을 두고, 테트 공세와 같은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 작전에서 북베트남은 주요 습격 부대를 베트콩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의 임무는 그들을 보호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이 공세로 인해 수많은 남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할 것을 예고하여, 인구 밀집이 적은 곳을 주요 타격 지역으로 잡았지만, 작전 실행 도중 한계를 직면하면서, 주요 시설이 밀집한 대도시를 주요 공습지로 정하게 되었다.
구정 대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상당 수의 지역에서 퇴각하여야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막강한 화력으로 응전하여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는 한 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으며 전투를 벌여 후에를 탈환하였다. 후에 전투 중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 측이 후에에 살고 있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수 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쟁 후 북베트남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민간인 살해를 인정하였다.)
북베트남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구정 대공세를 통해 잠시나마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들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구정 대공세는 그 동안 전쟁 승리를 낙관하였던 미국내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3.구정공세가 미국 여론에 끼친 영향
주베트남 미군을 총괄하던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표상으로 1967년 11월만 해도 B. 존슨 정부와 함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네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베트남 전쟁이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구정 대공세로 웨스트모어랜드의 단언이 허풍일 뿐이란 것이 드러나자 미국의 미디어들은 미군이 막대한 병력을 투입한 존슨 정부의 정책이 효과적인지 의문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존슨 정부는 군사적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존슨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지 않게 된다.
구정 대공세를 펼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구정 대공세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변환점을 맞게 된다.
그 동안 미국 정보 당국이 평가하고 있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전력이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언론인 피터 아네트는 벤쩨에서 근무 중인 익명의 장교가 “마을을 탈환하려면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하였다. 또 다른 정보원은 제9 보병 사단의 부리스 소령이 이러한 명령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CBS 이브닝 뉴스의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는 “우리는 지난 시기 잘못된 낙천가가 내놓는 증거들을 통해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패배에 직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비관주의일 것입니다. 냉정히 현실을 보면 우리는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체스에서 서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에 빠진 것 같습니다. 불만스럽지만, 그게 결론입니다.”라고 논평하였다. 크롱카이트가 이와 같이 논평하자, 존슨 대통령은 “크롱카이트를 잃는 다면, 미국 중부를 잃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4. 구정 대공세 결과
1968년 3월 구정 대공세가 정리되자 웨스트모어랜드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는 정규 인사의 결과였지만, 구정 대공세가 있었던데다 그가 20만 명의 증파를 요청하였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자,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은 그의 부관이었던 크레이톤 에이브람스가 승계하였다.
1968년 5월 10일 북베트남과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5개월 뒤 존슨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를 명령하기 까지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이었던 허버트 험프리를 선출하였고, 공화당에서는 전 부통령 리차드 닉슨을 후보로 선출하였다.
역사학자 로버트 달렉은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확전은 결국 미군 병사 3만 명과 자신의 대통령직을 댓가로 지불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반전 운동이 급격히 확산하면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선거 출마 중단을 선언하였고, 그에 더해 한 베트콩 장교가 남베트남의 경찰청장에 의해 즉결 총살되는 사진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더욱더 심각해졌다. (위키백과)
[정리]
구정 대공세 일련의 모습은 언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되었다. 미군과 남베트남 국군은 최종적으로, 이 싸움에서 전술적으로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패배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고, 남베트남 대통령군이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으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측의 승리를 확신했던 전 세계 국민 여론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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