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4번싸워 되찻은 평양성, 평양 전투(平壤戰鬪) 설명

올드코난 2015. 3. 2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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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平壤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1593년에 걸쳐 평양을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이 벌인 전투로 총 4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3차례 전투에서 조선군이 모두 패했으나 4차 전투에서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탈환했다.

임진왜란 평양성 함락에서 탈환까지 4차에 걸친 평양 전투(平壤戰鬪) 설명

1.전투 전

1592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임진왜란은 전쟁 초기 조선군들의 대패로 인해 한양, 임진강, 평양까지 밀렸고 이중 일본군 1부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임진강 전투에서 승리하자 평양을 함락시키기 위해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2. 1차 평양전투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한다. 7월 19일(음력 6월 11일) 조선 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4000명이 을미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했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와 이원익, 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으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오히려 패배해 왕성탄으로 건너왔다.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본 일본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평양성은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3. 조명연합군의 첫 패전 2차 평양성 전투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의주에 피란하던 선조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는 요동 부총병이자 당시 중국에서 이름난 장수였던 조승훈을 우군 부총병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의 명나라 1차 원군으로 파견되게 한다.

조승훈의 3000명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을 지원하였고 조승훈은 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하여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과 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남은 병력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4. 3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첫 패전 이후 일본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서 중화군의 임중량과 윤봉, 차은진과 차은로 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진지를 세우고 일본군들과 싸웠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화군을 대공격하여 의병이 대부분 전멸하고 윤봉도 전사했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총 2만 명의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결정했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을 흩여져 버리고 조선군은 왜군의 맹공격에 밀렸다. 남은 병력은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재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였으나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중 김응서만이 적진으로 돌격해 일본군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5. 4차 평양성 전투 - 평양성 탈환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병군의 패전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4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고 도원수 김명원과 우측 방어사 김응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된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은 성 방어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난공불락 요새로 바꾸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해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과 김응서는 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의 양호,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의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가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의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의 8000명 군사가,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의 3000명 군사가 추격에 나서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을,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7개월만인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용천(서흥군)-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만 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평양성 탈환은 임진왜란의 전제를 확실히 역전시키게 되는 중요한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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