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역사적인 참패 용인 전투(龍仁戰鬪)

올드코난 2015. 3. 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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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전투(龍仁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대패한 전투.

임진왜란 어처구니없는 역사적인 참패 용인 전투(龍仁戰鬪)


1.조선군 상황

음력 4월 28일 조선의 맹장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모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광을 맹주로 삼은 뒤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라 칭했다. 이광은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음력 6월 4일에 최초의 전투를 치렀는데 김수가 홀로 경상도의 장사 50명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고 유곡 찰방 김충민이 적 1명을 베고 봉사 정기룡과 강만남과 군수 김경로 등이 각각 하나씩 베었고 동향인 박태고가 왜군 2명을 쏘아 죽이는 등 초기에 5명의 적을 죽여 전과를 올렸다.


2.일본군 상황

용인 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 주력 1,000명은 한양에 주둔하고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시지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떠나 용인으로 이동한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채비를 갖췄다.

 

3.전투 과정

조선 장수들은 작전 회의에서 의견이 달라 크게 갈라졌다. 광주 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먼저 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광은 군율을 어기고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의 1000명의 군사들과 합세해 7월 13일(음력 6월 5일) 왜군을 공격했다. 권율이 다시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라고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백광언은 적이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갔다가 선봉장 이지시,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와 함께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맹장이었던 백광언과 이지시가 죽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다음날인 7월 14일(음력 6월 6일) 군사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할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하여 크게 패해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망쳤다.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할 수 있었다.


3.전투 결과

조선군 5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고 전사자는 32000명 이상으로 전해진다. 세부적인 기록은 수치스러운 기록이라하여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광주 목사 권율만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황진만이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채 퇴각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이 전투에 대하여 《징비록》을 통하여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 라고 비난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한양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더더욱 의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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