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첫 승리 해유령 전투(양주 전투)와 신각의 억울한 죽음

올드코난 2015. 3. 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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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蟹踰嶺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부원수 신각이 경기도 양주에서 조선 육군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지만 작은 전투였다. 전투가 벌어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양주 전투(楊州戰鬪)라고도 불린다. 무엇보다 신각의 억울한 죽음이 안타까운 전투였다.


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첫 승리 해유령 전투(蟹踰嶺戰鬪 혹은 양주 전투(楊州戰鬪)와 신각의 억울한 죽음


1.한강 방어전의 실패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사실상 마지막 정규군이 전멸하자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를 맡긴다. 그러나 1천여 명으로 4만명의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김명원은 6월 11일(음력 5월 2일)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하고 부원수 신각(申恪, ? ~ 1592년)이 이를 말렸으나 도리어 화를 내었다. 방어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김명원, 신각, 이양원은 모두 흩어지고 신각은 자신의 군사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 대장 이양원과 합류해 양주로 후퇴했다. 경기도 양주에 진을 친 신각은 함경남도 병사 이혼과도 합류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2. 해유령 전투 과정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제2진 가토 기요마사는 개성으로 도망가던 선조를 쫓기 위해 선발대 70명을 보낸다. 6월 25일(음력 5월 16일) 선조를 쫓기 위한 70명의 일본군 선발대가 해유령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최강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신립의 부대를 아주 쉽게 전멸시켰다는 사실에 조선군을 우습게 봐 무장도 제대로 갖추기 않고 술까지 마셨다고 한다. 이를 본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제히 활을 쏴 70명이 모두 전멸해 목이 베였다. 이는 조선 육군 최초이자 완전한 승리였다.


3.신각의 억울한 죽음

신각은 후퇴하는 와중에 김명원 및 조정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고, 때문에 임진강 방어선에서 싸우던 김명원에게 합류하지 못했다. 음력 5월 17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비변사는 신각을 적전도주자로 간주하고 정법하여 참형에 처했는데 《징비록》에 따르면 이를 주도한 것은 우의정 유홍이었다. 당사자에게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지나치게 성급하게 이루어진 처리였다. 2년 뒤인 1594년 음력 12월 21일 상소가 올라와 신각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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