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3번째 전투, 동래성 전투 과정과 결과

올드코난 2015. 3. 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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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 3번째 전투, 동래성 전투 과정과 결과


1.전투전

임진왜란전부터 동래 부사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어서 외부에서는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되고 정발을 포함한 조선군은 전멸을 하게 되고, 다음날 고니시의 일본군은 동래성을 겨냥해 움직인다. 부산성이 소규모였다면, 동래성은 실질적인 대규모의 전투였다.


2.2번째 전투 다대포 전투 패전

다대포 전투(多大浦戰鬪)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두 번째로 벌어진 전투로 병력, 식량, 무기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군이 완패하고 다대포성은 함락되었다. 다대포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낙동강 하구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다. 1417년 태종 17년 8월 20일에 수군도절제사 정문의 건의로 만호를 파견하였고 1490년 성종 21년 11월 다대포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3m 90cm), 둘레가 1,806척(5.4km)이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한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둘로 나눠 다대포로도 같이 공격했다. 1592년 4월 경주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대포에 왜군들이 벌떼같이 몰려있는 것을 확인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맞서 싸웠으나 죽고, 중과부적으로 결국 다대포는 부산과 같이 함락하고 말았다. 윤흥신의 자결로 다대포는 일본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다대포와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을 향해 진격했다.


3.병력 상황

전투 당시 일본군은 3만명으로 추정되며 고니시가 지휘를 맡고 있었다. 조선의 병력은 2500~3000명 정도였고, 민간인포함 약 2만명 정도가 있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이 지원을 왔으나 왜군의 수를 보고 겁을 먹은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슬쩍 빠져버렸고, 양산군수 조영규 역시 동래성으로 왔다가 동래성 4km 지점에서 후퇴해 버렸다.(도망으로 봐야)

결국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기를 포함한 모든 것이 열세였던 송상현에게는 동래성에 있던 병사와 군민 외에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죽기로 싸우기를 결심한다.



4.전투 과정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해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후세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정사는 아님)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송상현은 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의 조총공격은 조선군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일본군은 활로 인해 피해가 적었다.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이 동문임을 알아내고 집중공격해 결국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동래성으로 진입한 왜군은 병력의 우위와 뛰어난 전투력으로 조선군들을 손쉽게 제압한다. 동래성의 함락이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되니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송상현은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지만, 끝까지 저항한 동래성 백성들은 학살했다. 동래성 백성들은 성의 해자로 끌려나와 모두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호의적으로 봐서는 안되는 이유다.)


5.동래성 전투 결과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부산진성과 동래성 함락 후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경상도 및 충청도로 진격해 각지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충주까지 진격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조선군을 궤멸시키며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전 국토를 유린하게 되며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된다.


6.전투의 흔적(유적)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발견되었다.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환도, 창, 찰갑, 투구, 활, 화살촉 등 임진왜란 당시 무기 역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방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약 20여구의 인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준다.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도 조총과 철퇴 및 창검으로 찔린 자국이 선명했는데 특히 한 여성 유골은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이 시신과 버려진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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