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조선시대 붕당 정치는 당쟁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양당 정치의 시작이다.

올드코난 2015. 2. 1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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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우리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붕당(朋黨)을 당쟁(黨爭:당파 싸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이 우리 한민족에게 심어준 왜곡된 말로, 당쟁이 아닌 붕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조선시대 붕당은 조선만의 문제도 아니었으며, 18세기까지만해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절대 낙후되지 않았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조선 붕당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는 당쟁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민주적인 양당 정치의 시작이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 설명] *참고 : 대부분 위키백과를 인용해 정리했습니다.


1.붕당 설명

붕당(朋 벗 붕; 黨 무리 당)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정치인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에서는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죄악시했다. 송나라 이후 성리학 이념은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지지했다.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이 붕당은 당연히 하는 것도 이 논리 때문이다. 그리고 붕당 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정치 운영 형태로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 정치는 현대의 정당 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쟁(黨爭)이라는 단어가 없다.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기는 했다.


2.조선 붕당 요약

조선에서는 선조시대인 조선 중기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본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갈수록 당파에 연연해 치열한 대립각을 세우며 큰 문제가 되는데 조선 후기 마지막 개혁 군주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 정치는 끝을 맺는다.


3. 붕당은 왜 생겼나? (붕당 원인과 배경)

역사학자들이 조선 시대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은 크게 세 가지가 보는데 첫째,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이중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겼는데 여기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시작된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

선조 대에 사림 정치가 확산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문치주의의 절정을 꽃피웠다. 그러나 사림이 많아지면서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양태로 변하였다. 서인과 동인의 분당 배경에는 기성 관료와 신진 관료의 이해와 충돌, 학파와 지연의 차이, 그리고 척신 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성리학에서는 군자(君子)들의 붕당 형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에 사림 정치가 붕당 성립을 가져오는 것은 당시로서는 비난 받을 일이 아니었다.


4. 사림 최초의 붕당 동인(東人) 대 서인(西人)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 대신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한다. 사림파가 요직을 차지하면서 사림파다 둘로 자연스럽게 나뉘게 되는 최초의 붕당인 동인과 서인다.

1) 조선 최초의 동인(東人)은 사림파 중 신진 세력인 김효원, 유성룡, 이산해 등 영남 의 지식인 이황, 조식의 문하생들과 개성의 처사학자인 서경덕 문인들로 연합된 학연으로 뭉친 집단에 가깝다. 김효원이 집이 동쪽에 있다해서 동인으로 불린다.

동인은 대체로 지방의 청류를 자처하는 한사(寒士)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일원적인 학맥과 정책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자체 내에 이질적 요소를 많이 지닌 청류의 연합 세력과 비슷했다. 서인의 정책이 주로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어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안민(富國安民)에 치중했다면, 동인의 정책은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어 치자(治者)의 도덕적 자기 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동인의 구성원들은 신진 사림의 급진파로 이루어져 있어 훈구파의 척신 정치의 청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2) 서인(西人)은 대체로 서울 근방에 생활 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 기대승, 김인후(金麟厚)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서인으로 칭한다. 당시 왕비는 대체로 서울 근방의 고관 집에서 채택되는 것이 관례여서 자연히 서인 중에는 척신이 많았다. 심의겸도 명종 비(妃)의 동생으로서 외척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체질적으로 사림에 속하고 또 사림도 그를 존경해 옛날의 척신과는 달랐다. 초기에 기성 사림 중심의 서인은 학문적 구심이 없어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인과 서인 사이의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이가 서인에 합류하고 성혼도 서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이 서인의 구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5. 붕당 대립 구도 성립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의 성립은 1575년(선조 8년)으로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에서 시작된다고 보는데, 서인과 동인의 분당은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의 아우(심충겸)와 김효원이 서로 다툰 데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조 전랑은 5품· 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옥당) 출신의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로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또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던 것이다.


6. 서인의 권력 장악과 동인의 분열

1589년 선조 22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2년 뒤 1591년에 동인은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 삼아 서인의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건저문제).

그때 선조가 동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인은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정철의 처벌 문제로 인해 강경파(급진파)인 이산해 중심의 조식·서경덕계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유성룡 중심의 이황계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 기축옥사 때 피해를 입은 세력이 조식·서경덕계였으므로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정철 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혼란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일시적으로 서인과 북인과의 공존 체제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화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강경책을 취했던 북인이 득세하고, 북인이 다시 광해군을 내세운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내세운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어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과 남인에 비해 학문적 기반이 부족했던 대북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지향하고 다른 당파의 배제를 꾀하였다. 그러나 북인의 탄압을 받던 남인과 서인이 연합하여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이후 북인은 정계에서 숙청되어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형식적으로 남인과 연합 정국을 구성하였으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북벌론을 국시(國是)로 하면서 성리학의 대의(명분론·의리론과 원칙론)에 충실한 서인의 입지는 더욱 커져 갔다.


7. 예송과 환국, 붕당 대립의 격화

숙종대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세 차례에 걸친 환국으로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때, 붕당의 변질을 가져온 두 가지 문제가 예송과 환국이다.

예송은 상복을 입는 기간에 관한 문제로 효종과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효종의 모친이자 선왕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관한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까닭은, 인조와 그의 제 1비였던 인열왕후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병사하여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했으나, 둘째 아들이었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예송에서 효종이 죽었을 때, 서인은 효종이 둘째아들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1년 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3년 상을 주장하였다. 결국 서인이 승리하여 1년 상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하지만 2차 예송에서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조대비(자의대비)가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여 1년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그로써, 서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경신년 허적의 집에서 있었던 연시연을 계기로, 서인은 경신환국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숙종의 계비로 들이는 등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다시 집권하여 당시 남인이 들였던 후궁인 희빈 장씨(장희빈)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중전이 되고,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실각한 서인은 이 과정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었다. 노론과 소론은 경술환국을 통해 복권하면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인현왕후가 복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영조 즉위 때까지 이어졌다.


8. 영조 시대, 노론 집권

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 탕평책(蕩平策)을 시작한다. 노론과 소론 양쪽의 주요 인물들을 외척으로 만들어 세력의 안정화를 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탕평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당파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어찌되었든 영조의 시대 주류는 분명 노론이었다.


9. 정조 시대, 시파와 벽파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표면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국정의 철학으로 명절과 의리를 제시하고 자신의 국정 운영에 부합하는 세력(남인의 청남계, 노론의 청명당계 등)을 중용했다. 영조의 탕평책과 대비해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峻論蕩平,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탕평책)이라 부른다.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죽음을 에워싸고 시파와 벽파 간의 당쟁이 일어난다. 장헌세자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벽파가 생겨났는데, 홍봉한 일파는 시파에 속하고 김귀주(金龜柱) 일파는 벽파에 속하는데, 이로써 노론의 분열은 물론 소론·남인도 주로 시파에 속하는 등 당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자 자연히 시파를 가까이했으며, 순조가 즉위했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서파와 공서파의 대립이었던 신유사옥도 이 시파·벽파의 대립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10. 붕당정치의 끝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가 죽고 순조 대신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국내 로마 가톨릭 신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잡게 되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붕당정치는 끝난 것으로 본다.


11. 조선의 붕당 과정 정리

세조가 권력을 잡은 이후 공신들인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두 개의 집단이 맞서던 상황은 붕당이라기 보다는 신구의 대립으로 본다. 명종시대까지 훈구파가 훨씬 권세가 커 사실상 독재정치를 행세하다가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대에 이르러 훈구파가 분열하게 되는데 파평 윤씨 일가인 윤임과 윤원형을 영수로 삼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를 최초의 붕당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는 한 집안의 권력에 의한 분열로 봐야 할 것이다. 대윤과 소윤은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세를 떨쳤지만, 윤임과 윤원형의 죽음으로 당은 거의 사라졌다. 선조 이후부터는 훈구파를 대신해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당대의 대학자 이이와 이황을 영수로 하여 나뉘었다. 이후 동인은 후에 이황의 제자인 남인과 그 외 인물은 북인으로 분할되었고, 이이의 당파인 서인은 한때 정권을 잡았지만, 광해군 시절 북인에서 갈라진 대북과 소북으로 말미암아 서인은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득세한 이후로 남인과 당쟁을 벌였고, 남인을 꺾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할되어 당쟁을 서로 벌였다.

현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이때 남인은 서인 처벌을 엄히 하자는 청남과 느슨하게 하자는 탁남으로 나뉘었다가 영조 때에 다시 남인으로 통합된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여 사색당파를 고루 등용한다고 하였지만,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의 영향으로 사색당파가 벽파와 시파로 나뉘었다. 이때 노론은 대체로 벽파로서 사도세자에 반대하여 그 죽음을 방조 또는 찬성했으며, 시파는 대체로 노론과 북인을 제외한 나머지로서 사도세자를 지지하여 그 죽음을 반대하였다. 정조의 즉위로 시파가 득세했지만, 정조 말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한 공서파와 그에 대해 느슨하게 대한 신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벽파가 주를 이루며, 신서파는 시파가 주를 이루었으나 동일한 당파이지는 않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벽파가 크게 득세한 가운데 공서파도 세를 얻지만, 시파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고, 신서파는 몰락한다. 그 뒤 시파인 김조순의 세도 정치로 붕당은 종말하였다. 사색당파인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정치적 당파이면서 학파의 성격을 지니지만, 시파·벽파 및 공서파·신서파는 정치적 당파일 뿐 학파와는 무관하다. (출처: 위키백과)


[요약] 훈구 대 사림 => 훈구의 분열: 대윤과 소윤 & 사림 => 사림의 분열: 동인 & 서인 => 동인의 분열: 북인, 남인 & 서인 => 북인 분열: 대북, 소북 & 서인, 남인 => 서인, 남인 시대 => 서인 분열: 노론, 소론 => 시파, 벽파,



12. 조선 붕당 정치에 대한 평가

조선 시대에도 당대 지식인들은 당쟁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했다. 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당쟁의 원인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붕당이 있던 시기는 조선은 물론 세계사적으로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계급사회고 붕당과 유사한 정치 집단을 수시로 만들고 없애는 과정을 반복했다. 아직 민주적인 사고와 정치가 없던 시기 조선의 붕당은 단순히 권력 투쟁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선 초기 외척과 공신(훈구파)들이라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 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조선의 왕들이 독재 정치를 함부로 할 수도 없었고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조선의 멸망은 정조 이후 붕당 정치가 붕괴하고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대에 가장 민생이 안정되었음을 볼 때 역설적이게도 당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살기 좋았다. 당쟁이 치열해질수록 숙종은 민생을 위한 정치를 행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선 백성들의 삶이 어느정도 안정을 갖게 된다.

[참고 사례: 위키백과]

당쟁의 폐해를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보던 지적에 대해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기존 국사 학자들이 일본 극우 학자인 시데하라 아키라 등의 주장한 당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당쟁이 격심했던 이 시기는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50년 정도였으며, 이때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따르면, 모두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이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하루에만 무려 1천3백 명이 정치적 이유로 희생되었고 파리 코뮌 기간, 흔히 “피의 주간”이라 불렸던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05년 1월 22일 당일에는 15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13. 마무리

독재 국가가 부패하는 것은 견제를 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맞출 때 이루어 지는 것이다. 조선의 붕당은 당시 백성들의 삶에 크게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포악한 군주를 막는 역할은 분명히 했다. 연산군 이후 조선시대에 패륜을 저지른 임금이 없는 것은 바로 붕당에 있는 것이다. 붕당은 절대 권력을 막음으로써 조선이 500년을 지속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지, 계급사회로서의 한계와 사대부들의 기득권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의무를 주었다는 점은 비판 받아야 한다. 하지만, 조선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부패하고 무능했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

이유는 조선의 붕당이 어느정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시대에 많은 국가에서 독재자 혹은 왕들이 자국의 백성들을 학살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산군을 제외하면 그런 일이 없었다. 연산군 이후에 붕당이 생기면서 폭군의 출연을 막은 것이다.

최소한 1800년까지 조선은 세계 다른 국가에 비해 정치적으로 절대 부족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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