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천민으로만 알고 있는 백정 (白丁) 실은 북방유목민 타타르인이었다. (백정 뜻과 유래)

올드코난 2014. 12. 1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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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전] 조신시대 천민 계급 백정 (白丁)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 설명

1423년(세종 5) 국가에서 이전의 화척(禾尺:楊水尺)·재인(才人)에게 농토를 주고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의 명칭을 신백정(新白丁)이라고 개칭했다. 이는 이들이 일반농민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오히려 '백정'이란 용어가 천민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계기가 되었다. 화척의 기원은 고려시대에 들어온 북방 유목민인 타타르인(韃靼人) 계통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조선시대까지도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거나 별도로 부락을 이루어 살았으며 일반민과 통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착한 집단일지라도 일반인과 구별해 국역과 조세부담은 지지 않았다. 다만 사옹원에 소속되어 1호당 1정씩 차출되어 수유(酥油) 제조의 역을 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역은 일반민보다 가벼운 편이어서 빈민들이 투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생업이 곤란한 경우 군도(群盜)로 둔갑하는 일도 많았는데, 특히 고려말에는 왜구 못지않게 이들의 작란(作亂)과 약탈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세종대의 신백정 정책은 이같은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이후에도 이들은 쉽게 동화되지 않았으며, 일반 농민들도 이들과의 교류를 꺼렸다. 이들은 주로 수렵·도살업·고리[柳器] 제조와 판매 등에 종사했으며, 물자의 공납역을 지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작란이나 집단적 유랑이 줄었으며 대신 천인집단으로 고정되었다. 도살업은 이들의 대표적인 직종이었는데, 전국의 도살업을 거의 전담했다. 도살업과 육류 판매 이익이 높았고, 천민으로 국가에 다른 역을 지지는 않았으므로 몰락한 빈민들이 백정으로 투신하기도 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백정의 수효가 증가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백정도 신분적으로 해방되었으나 일반민 사이에서의 백정에 대한 인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일제하에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났다.

 

TV 역사 이야기 EBS 역사채널e 외면당한 진실, 백정 편

 

가장 비천한 천민계급 백정, 그들은 한민족과는 뿌리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가장 비천하다고만 알려진 천민 계급 백정에 대해 알아본다.) (글/사진 출처 EBS)


1899년 조선에 상륙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W.F.샌즈’가 인천 제물포항에서 처음 본 조선인은 다름아닌 백정이었다. 근데 그 인상착의가 동양인과는 사뭇 달랐는데, 눈동자가 회색이나 푸른색 혹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으며 키가 180cm가 넘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백정)을 처음 보았을 때 혼혈 혈통이라 생각하기 쉽다. - W.F.샌즈가 쓴 ‘극동회상사기(1930년 발행)에 기록되어 있다.

 

 

[백정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 보면.]

1.고려사 열전: 거주하는 장소가 일정하지 않고 사냥과 고리(짚단 등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살아간다.

2.조선왕조 실록 태조 1년 9월 24일: 백정은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상시 모여서 소와 말을 도살한다

3. 조선왕조실록 성종 22년 4월 23일: 우리나라의 백정은 그 선조가 호종(북방 오랑캐)입니다. 백정은 말을 잘 터거나 활을 잘 쏘고 사납고 용맹하여 짐승을 사냥하는데 익숙하다.

4. 조선왕조 실록 중종 5년 8월 4일: 우리나라에는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사냥과 고리를 만들어 먹고 사니 호적에 등록된 일반 백성과는 다르다. 이들을 백정 (白丁)이라 한다.

 

고려시대 백정의 옛이름은 양수척(揚水尺: 물 심부름꾼)이고 또 다른 이름은 달단(韃靼:)이었다. 달단은 타타르 족을 일컫는 말로 중국 한족(漢族)의 북방 유목 민족에 대한 총칭으로 명대(明代)에는 동몽고인(東蒙古人)을 가리켰고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와 몽골 인민 공화국의 동부에 거주했었다. 현재의 타타르(Tatar)는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서부에 있는 자치 공화국이다.

 

백정은 바로 이 타타르 인으로 생각이 되며 이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였는데, 당시 거란과 오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에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 한반도로 유입이 되었고 바로 이들이 양수척 혹은 달단 등으로 불리며 무리를 이루게 된 것이 백정의 시작이다.

 

[조선 전기]

조선시대로 넘어와 이들 달단을 사회에 흡수시키려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른바 신백정(新白丁) 정책을 시작하게 된다. 백정 (白丁)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천민이 아닌 일반 백성을 의미했었다. 조선은 백정에게 농사를 권하고 평민과 혼인하게 하는 우호적인 정책을 편다.

하지만, 사냥과 유랑생활에 익숙한 백정은 유목민의 습성이 강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부락을 이루며 살아간다. 조선인들과 스스로 단절했던 것이지 조선에서 이들을 구분했던 것이 아니다.

 

이들 백정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조선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백정의 뛰어난 도축기술과 육류 가공법은 조선의 식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호환(虎患)이 극심했던 당시 조선시대에 백정은 호랑이 사냥꾼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들 백정은 여전히 천대와 멸시의 시선을 받게 되는데, 조선인들은 이들 백정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말고 섞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 W.F.샌즈 ‘극동회상사기(1930)

 

[조선 후기 ]

이들 백정이 조선인들과 섞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인 후기에 들어와서부터다. 혼란스런 정국에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정착생활을 하는 백정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조선인의 서로 다른 혈통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백정 (白丁)이라는 말은 북방계 유목민이나 천민이라는 뜻에서 전문도축업자를 일컫는 말로 바뀌어 갔다.

 

조선 말(구한말) 근대화의 영향으로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던 백정은 수백년동안 한반도에서 공존해온 이제 낯선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 아니라 조선의 한 축을 이끌어온 우리의 선조인 것이다. (EBS)


[결론]

백정하면 대부분 임꺽정을 떠 올리고, 천민이라고 만 알고 있다.

나 역시 백정에 대해서는 그런 정도만 알고 있다.

하지만, 백정은 단순히 계급 사회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국(조선)에 들어온 타타르인(유목민)들을 조선인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비록 백정 집단이 조선인과 섞이지를 못하고 천민으로 그 의미가 굳어지기는 했지만, 조선 전기만해도 조선은 계급사회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사말] 일본인들이 심어 놓은 식만사관 중에서 일본이 조선의 계급 사회를 무너뜨렸다고 주장하는 것에 너무 오랬동안 속아 왔다. 조선 사회가 폐쇄적인 사회가 되기는 했지만, 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형편 없는 국가는 아니었다. 앞으로 틈이 나는 대로 조선 시대에 관한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금씩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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