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첫 번째 전투, 부산진 전투(釜山鎭戰鬪)

올드코난 2015. 3.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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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첫 번째 전투, 부산진 전투(釜山鎭戰鬪)는 참혹한 패배였지만, 장렬한 최후였다.


1.전투 전

정발은 임란 발발 직전 부산포에서 일본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아서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을 절영도에서 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군의 침략사실을 알게 된 정발은 급히 부산진 소속 판옥선들을 자침시키고 부산진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부산진성으로 소개시키는 등 방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부산진의 병력은 600여명에 불과했고 피난민들을 합쳐서 겨우 천여명에 불과한 수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의 상관인 박홍은 무능한 겁쟁이였다.


2.부산진 전투(釜山鎭戰鬪)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을 명하자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한다. 왜군의 모습을 본 정발의 직속상관이었던 경상좌수사 박홍은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부하 우후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망쳤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절영도에서 밤을 지낸 고니시는 부산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진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오전 5시~7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부산진의 서문을 공격했지만 서문이 견고한 탓에 서문을 깨는 데에는 실패했고, 대신 서문 밖의 높은 고지로 올라가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은 활과 각종 총포을 쏘며 맞섰다.

맹렬했던 일본의 공격은 조선군이 부산진 성벽 밑에 뿌려둔 뾰족한 마름쇠 때문에 아침 7시에 잠시 중단되었다.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10시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정발과 군민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컸고 지원조차 받지 못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한 장수가 정발에게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지만 정발은 "성을 버리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12시쯤, 일본군은 부산진의 취약지구인 북문쪽으로 밀려들었고 정발은 일본군에 맞서다가 머리에 조총에 맞아 숨졌고 그를 따라 같이 싸우던 장수들인 이정녕과 중위장 장희식, 부사맹 이정헌 등은 전사하였고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고 그녀의 몸종인 용월, 기장 사람 신옥 등도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으며 부산진에서 싸우던 병사인 가은산 등 3인은 시체더미에 숨어있다가 고니시가 살육을 중지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나고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뒤 부산진 전투에 대한 것을 증언하였다.



3.부산진전투와 정발에 대한 평가

비극적이고 참혹한 패전이지만, 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일본 장수 마츠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라고 적고 있다. 전투전 별다른 저항이 없을 걸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고니시는 정발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첨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발은 잠시 적전도주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부산 시내에는 정발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부산진 첨사(첨절제사)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 역시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조리 죽거나 학살되었다. 반면 왜군의 피해는 140명의 사상에 그쳤다.


4. 부산진 전투의 의미(개인적 생각)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전투는 단 하루 4시간의 매우 짧은 전투였다. 조선군은 전멸했다. 

당시 병력, 무기, 훈련상태 등을 종합했을 때, 부산진 전투는 예정된 패배였다.

하지만, 비록 패전으로 끝났다고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반나절도 안되는 짧은 전투에서 정발과 휘하 군사들은 용맹하게 싸웠다. 이후 20일만에 왜가 한양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데, 만일 정발이 싸우지 못하고 원균이나 박홍처럼 도망을 쳤다면, 동래성은 더 빨리 점령이 되었고, 그리 되었다면, 일본군은 더 빨리 한양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며, 피해 또한 더 적었을 것이다. 그리되면, 선조가 왜의 장수 고니시에게 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상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부산진 전투 이후 동래성전투까지 참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정발과 송상현장군의 장렬한 최후가 있었기에 최소 2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에서 2일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큰 것인가.


5.마무리

임진왜란 첫 번째로 벌어진 부산진 전투(釜山鎭戰鬪)는 병력, 식량, 무기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군이 완패하고 부산진성은 함락되었지만, 정발과 병사들은 장렬히 싸우고 전사를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원균과 박홍은 지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쳤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자.


이제 부산진을 함락한 고니시는 진군을 멈추지 않고 동래성으로 향한다. (다음페이지 동래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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