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상주 전투 패배 경상도를 전역을 함락한 왜.

올드코난 2015. 3. 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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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부산성을 함락하고, 다음날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동래성을 함락한다. 단 2일만에 남쪽 최전방이 모두 다 뚫려 버린 것이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하게되는데..

임진왜란, 상주 전투 패배 경상도를 전역을 함락한 왜.


1.경상도를 함락시켜가는 일본

(1)양산전투

1592년 5월 27일(음력 4월 17일) 양산 목사 박진은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겁을 먹어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밀양으로 후퇴하고 양산은 왜 육군 3부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된다.

(2)밀양전투

1592년 5월 28일(음력 4월 18일) 밀양으로 후퇴했던 양산 목사 박진은 군민 300명을 모아 밀양 작원관에서 부산진과 동래에서의 전투 이후 최초로 전투다운 전투를 벌였다. 협곡을 건너오는 왜 육군 1부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마쓰라 시게노부의 기습 공격으로 괴멸당했고 결국 박진은 다시 후퇴한다.

(3)언양 전투

159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사기가 떨어진 언양 역시 왜 육군 2부대 가토 기요마사에게 허무하게 함락된다.

(4) 김해전투

1592년 5월 30일(음력 4월 20일) 김해 부사 서예원은 관군 1000명을 이끌고 김해 방어에 나서 서예원은 중군을 맡아 남문을 지키고 부하 이유겸을 서문에 배치했다.

양산을 함락시킨 구로다 나가마사가 김해로 쳐들어오고 초기에는 관군은 열심히 싸웠으나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고 밀양에서 지원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으로 이유겸은 도망치고 서예원 역시 결국 도망치고 만다. 이에 남은 군민들이 일어나 동문에는 김득기, 서문에는 류식, 남문은 송빈, 북문은 이대형이 맡아 다시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김해는 무너지고 만다.

(5)경주 함락

1592년 5월 31일(음력 4월 21일)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로 진격하고 경주 판관 박의장이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고 일본군은 경주성에 입성해 불국사와 분황사 같은 문화재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을 질러 경주의 문화재가 크게 훼손되었다.

(6)창원, 문경, 성주 함락

1592년 5월 31일(음력 4월 21일)과 6월 1일(음력 4월 22일) 가토 기요마사는 창원과 영천을 쉽게 함락시킨다.


2.상주전투전 상황

당시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 지방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진격하고 있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왜 육군 1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 상주로 내려 보내고 군관들을 배속시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경상순찰사 김수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여 이일과 합류하기로 약속하여 약속장소인 대구에 집결하였으나 총사령관인 순변사 이일이 며칠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고 이 지역 지휘관인 박홍과 이각은 도망쳐버렸다. 순변사 이일은 한양에서 300명의 군사를 모아 내려가려 했으나 시간이 지연되고 가는 도중 군사들이 도망쳐 버렸다. 이일은 6월 2일(음력 4월 23일)에 문경을 거쳐 상주에 도착했으나 상주성을 지켜야 할 상주 목사 김해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판관 권길만이 상주를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를 모집하여 자신이 데려온 군사 60명을 합쳐서 총 800명의 임진왜란 발생후 조선 최초의 주력 병력을 편성했다.


3.상주전투 과정

6월 2일(음력 4월 23일) 저녁에 개령에 살던 한 사람이 이일을 찾아와 일본군이 근방까지 왔다고 알려주었으나 이일은 그 말을 믿지않고 개령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번대는 5월 29일(음력 4월 19일) 밀양을 점령하고 5월 31일(음력 4월 21일)에 대구로 진출하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선산에 진출하고 있었다. 6월 3일(음력 4월 24일)이 되어도 적이 나타나지 않자 이일은 그 개령 사람을 처형시켜 버렸다. 이일은 아침부터 상주성 북쪽 북천 강변에서 군사 훈련을 했는데 그러나 이일는 적이 어느정도까지 진출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와중에 그 주변지역에 보초도 내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고 있었고,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은 정찰을 하고 있는 일본군 척후병들을 발견하였지만, 아침에 죽은 사람이 생각나 감히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조선군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상주성 안 두어 군데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이일은 급히 군관 한명을 보내 알아보내도록 하였는데, 군관이 다리 밑을 지나가던 순간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일본군 저격병이 조총으로 저격한 뒤 목을 베어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조선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졌고 일본군들은 대규모 기습 공격을 하여 조총을 쏘며 접근했다. 조선군은 활을 쏘았으나 후퇴하였고 곧 일본군들이 포위하여 사면 압박해 결국 이일은 도망쳤고 남아서 싸우던 군사들 모두 전사했다. 이일과 2명의 군관만이 조령의 조방장 변기와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후퇴했다.


4.상주전투 이후

1592년 6월 5일(음력 4월 26일) 상주 전투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으로 진격했는데 문경은 성 안이 비어있었다. 문경 관아를 지나는 도중 문경 현감 신길원이 2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화살을 쏘며, 기습 공격을 했으나 전투 끝에 신길원은 투항을 거부하다가 참수당하고 문경은 돌파당한다. 1592년 6월 6일(음력 4월 27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을 함락시킨 여세를 모아 성주까지 함락시킨다.


경상도를 점렴한 왜는 이제 충청도로 진격해 들어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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