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설명

올드코난 2016. 3. 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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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비슷해서 헛갈리는 경우가 간혹있는데, 지금 소개하는 명성왕후가 그러하다. 명성황후 민비와 ‘황’과 ‘왕’의 차이 'ㅎ'의 차이 때문에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소개하는 왕비는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이다.

악처와 악녀로 알려진 조선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설명


1. 가계 및 출생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1642년 6월 13일/음력 5월 17일 ~ 1684년 1월 21일/1683년 음력 12월 5일)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정비, 본관은 청풍(淸風). 정식시호는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로 불리기도 한다. 김육의 아들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과 덕은부부인(德恩府夫人)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났다. 숙종의 어머니. 숙종과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등 1남3녀를 낳았다.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남편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 세자빈과 왕비

10살이던 1651년 세자(현종)과 혼인하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는데, 시아버지되는 효종이 무척 이뻐한 것으로 보인다. 늙은 신선이 사내아이를 안고가는 그림 한 폭을 주며 “아름답구나, 조선을 복되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효종이 손자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1659년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이 되며 왕비가 되지만, 이때 시어머니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가 매우 엄해 명성왕후는 숨을 죽이며 지내게 된다. 여기에 현종이 어머니 인성왕후의 말보다는 신료들의 뜻을 따르면서 인선왕후와 현종의 사이는 나빠지고 그래서 며느리되는 명성왕후는 더욱더 자세를 낮추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세월은 인성왕후와 남편 현종이 같은해 죽음으로서 끝나게 된다.


3. 왕대비

1674년 인성왕후가 죽고 몇달후 현종 역시 갑자기 죽자 아들 숙종이 즉위한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왕대비가 되는데 당시 숙종은 14세였다. 어린 나이이기에 명성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문제는 당시 남인들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친정은 서인들이었지만, 당시 송시열을 제거하려한 것이 남인을 지지한 것이 되었을뿐 속해 있는 당은 서인이었다.

당시 숙족이 즉위를 했을당시 인평대군의 세아들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을 일명 삼복이라 일컬었는데, 효종과 현종의 지나친 사랑이 이들을 교만하게 만들어 횡포를 많이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중 복창군이 궁녀와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14살이라는 어린나이였기에 이들이 왕위를 넘볼수 있다고 판단한 명성왕후가 나서게 되는데, 이때 인성왕후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복창군과 궁녀의 연애 사실을 알려주고, 숙종은 복창군을 귀양보낸다.(홍수의 변)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성왕후는 이들을 죽이라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 남인은 반대하고 오히려 명성왕후를 정사에 관여를 했다는 이유로 신료들에게 비난을 받게되는데, 명성왕후를 중종의 계비로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에 빚대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다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친정 아버지 김우명 역시 심한 모멸감을 당해 화병을 얻어 죽고 만다.


4. 장희빈 사건

명성왕후하면 장희빈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데, 희빈 장씨(禧嬪 張氏)는 궁녀출신이지만,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장희빈은 20대왕인 경종을 낳아 이후 왕비까지 되는데, 이런 장희빈을 몰락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바로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는 장희빈이 남인이었고, 권력욕이 강하다는 점을 무척 싫어했는데 결국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은 쫓겨나고 이후 죽음까지 당하게 되는데 이는 숙종의 변심만은 아닌 것이다.


5. 최후

1683년 아들 숙종이 기질(奇疾)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무속 신앙을 믿었던 명성왕후는 숙종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벌인다. 무당이 숙종에게 삼재(三災)가 있어 기질을 앓고 있는 것이니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 벌을 서야 한다는 계시를 내린다. 이런 무당의 터무니없는 말대로 당시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다 그 후유증으로 독감을 얻어 그해 1월 21일(음력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죽었다. 사후 무녀가 옥교를 타고 궁에 예사로이 출입을 한 사실과 무녀의 계시로 죽었으니 무녀를 처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숙종은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종결한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현종과 합장된 숭릉(崇陵)이다.



6.올드코난 생각

명성왕후 이전에는 이토록 당파를 분명히한 왕비가 없었다. 자신은 서인이며 다른 당인 남인을 없애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행동해 보였다. 명성왕후의 이런 태도는 왕비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되며 외척에게 힘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조선 초기의 원칙이 무너진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명성왕후 이전에도 포악한 왕비가 있었지만, 이는 성품과 권력욕때문으로 명성왕후는 여기에 당색을 더했다. 정당에 속했다는 것은 분명한 정치 의사를 표한 것이다. 그래서 명성왕후는 문정왕후 같은 악녀는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조선에 외척이 득세를 하는데, 하나의 선례가 됨으로서 이후 안동김씨같은 세도정치가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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