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영조의 후견인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올드코난 2016. 3. 1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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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여러번 장가를 들었는데 정비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1661년 - 1680년)가 일찌 죽은 후 2명의 계비를 얻게 된다. 제1계비는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년 ~ 1701년)였고 제2계비는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년 ~ 1757년)로 영조에게는 은인같은 존재인 인원왕후에 대해 설명해 본다.

영조의 후견인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설명


1.개요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년 11월 3일/음력 9월 29일 ~ 1757년 5월 13일/음력 3월 26일) 조선 숙종의 두 번째 계비. 휘호는 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 본관은 경주(慶州),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이다.


2.왕비 책봉 이유

이 당시 조선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는데 견원지간으로 서로를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으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살벌했다. 이 시기 숙종의 첫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승하후 1702년(숙종 28) 10월 3일 당시16세에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원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이유는 그녀의 집안이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경종)의 지지세력이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3.연잉군(영조)의 후견인

후궁인 숙빈 최씨, 영빈 김씨와 가깝게 지냈고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해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숙종이 연잉국을 총애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숙종은 죽기전에 세자를 연잉군으로 바꾸려고 했었고 이를 지켜본 인원왕후는 연잉군으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그녀의 집안이 소론이지만 자신은 노론으로 당적까지 바꾸게 되고 영잉군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숙종이 죽고 경종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는데, 당시 경종은 후사가 없었다. .

이때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연잉군은 노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노론의 힘이 강해 경종 입장에서는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노론은 경종을 부정하고 연잉군을 임금으로 만들려고 공공연히 떠드는 지경이었다. 이러한때 경종 원년(1721년) 영조를 왕세제로 등극시키고, 인원왕후가 연잉군을 양자로 입적했는 것은 인원왕후는 경종 대신 영조를 선택한 것이고, 이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인원왕후는 영조가 즉위를 할때까지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준다


4.사후

경종이 37세 젊은 나이로 죽고 후사가 없어 결국 연잉군이 즉위한다. 이때 인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고 영조의 효도와 왕비 정성왕후의 호강을 받으며 33년간을 호강하며 사는데 역대 조선의 왕비 중 여생이 편했던 왕비중 한명이었다. 며느리 정성왕후가 65세로 죽인지 약 한달 후 영조 33년 1757년 5월 13일 (음력 3월 26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71세로 죽었다.

무덤은 서오릉의 명릉(明陵)이며 숙종, 인현왕후와 묻혀있다.

《션균유사》,《션비유사》,《뉵아육장》 등의 한글 저서를 남겼다.



5. 올드코난 생각

인원왕후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정쟁에 휘말리지도 않았지만, 이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소론의 집안이었지만, 숙종의 의도를 알아채고 노론으로 당적을 바꾼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 세자 경종보다는 연잉군을 적극 후원한 점에서도 인원왕후가 앞을 내다 보다 볼 정도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무엇보다 숙종말기 노론이 소론에 의해 죽음을 당할 시기 연잉군을 끝까지 보호해 살려주었다는 점에도 과감성과 결단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된다.

종합해보면 인원왕후는 왕비로서 자질이 있던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 71세를 살 정도로 건강까지 좋았다. 만일 일찍 태어나 숙종의 정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숙종의 든든한 정치적인 조력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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