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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사유피 인사유명 (豹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 유래 설명

올드코난 2016. 10. 1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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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값비싸고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이 남긴다는 의미의 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은 원래 표사유피 인사유명 (豹死留皮人死留名)에서 유래된 것이다. 설명해 본다.


표사유피 인사유명 (豹死留皮 人死留名)

1.뜻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은 명예를 중시해야 함을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2.유래

이 이야기는 신오대사(新五代史) 왕언장전(王彥章傳)에 나온다.

오대십국 시대 무장 왕언장(王彦章)은 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되는 한 쌍의 철창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왕철창(王鐵槍)이라고 불렸다. 왕언장(王彦章)은 당(唐)왕조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으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올라 후량(後梁)을 세운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 원래 이름은 온(溫),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워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것)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그러던중 주전충이 병석에 눕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고 주전충의 아들 주우규(朱友珪)가 아버지 주전충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지만, 다시 동생 주우정(朱友貞)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황제에 오른 주우정(朱友貞)은 무능했다. 결국 간신들이 판을 치고 왕언정을 시기하고 있었다. 이런때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勗)이 쳐들어오고 두 나라의 군대는 덕승(德勝)에서 맞붙지만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왕언장은 패하고 여기에 간신들의 모함까지 받아 병권을 박탈당하고 초토사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말았다. 이 후 진왕 이존욱은 후량의 영토 상당수를 차지하고 국가 존망 사태까지 이르자 조정은 다시 왕언장에게 다시 군사를 맡기지만 왕언장은 첫 전투에서 패하고 생포되고 말았다. 진왕 이존욱이 그의 재능을 아껴 투항할 것을 권하자, 왕언장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쟁에서 패하였으니,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장수 된 자로서 아침에는 양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길 수는 없소. 대왕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린다 해도 나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소. 자기의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이오.” 왕언장은 결국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왕언장은 무인으로 글을 읽지 못했는데, 언제나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인용해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彥章武人, 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3. 뒷 이야기

후에 당나라의 문인 구양수(歐陽修)는 왕언장화상기(王彥章畵像記)에서 왕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은 본래 무인이라서 글을 알지 못하고 그 말은 질박했다. 평생 동안 항상 다른 사람에게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말하고 다녔다. 아마도 그의 의기와 용기와 충성과 신의는 천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랬으리라.(公本武人, 不知書, 其語質, 平生嘗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蓋其義勇忠信出於天性而然.)


4. 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는 표사유피(豹死留皮)’가 변질된 것으로 왕언장의 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호사유피’로 변했고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쓰이게 된 것이다. ‘표사유피’는 표범 가죽의 아름다움을 뜻하고 ‘호사유피’는 호랑이 가죽의 값어치를 중요하게 본 것인데 일본에서는 호랑이 가죽을 가장 값비싼 장식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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