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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태 이원갑 증언, 사북탄광 노동항쟁 (사북 사건) 내용 정리

올드코난 2016. 12. 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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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 발생한 사북탄광 노동항쟁 (사북 사태 (舍北事態) 또는 사북 사건(舍北事件)은 1980년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1. 사북 사태 개요

사북탄광 노동항쟁(사북 사태 또는 사북 사건)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당시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고 사북읍 탄광에서 발생해 사북 사태 혹은 사북사건이라 불린다. 4월 24일 종결되었다.


2.배경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의 광부들은 1970년대 정부의 노동 3권 탄압 등으로 인해 기본권이 제약된 막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아주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고 경영주의 부당한 임금 책정과 노조 지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또한 지역 경찰, 정보기관 등 공권력은 회사 측과 유착하여 노조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1979년 4월부터 6대 노조지부장선거 부정의혹을 둘러싸고 1년여 동안 노조 운영이 파행사태를 겪고 있었다.


3. 사건 발생과 과정

광부들은 회사 입장에 서서 임금인상을 결정한 어용노조의 위원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1980년 4월 18일 오후 노조지부장과 사북지서장은 사북지서 앞마당에서 노조원들에게 집회를 열어 토론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4월 21일 14시경 노조원들은 예정된 집회가 불허된 사실을 알고 이에 항의하고, 이 광경을 찍고 있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관이 도주하면서 광부들을 경찰차로 치고 달아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지서 등 주요 건물들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사북사건이 발생한다.

다음날 4월 22일 오전 일단의 광부와 부녀자들은 노조지부장의 부인을 기둥에 묶어놓고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강원도경 경찰의 진압작전에서는 광부들과 주민들이 던진 돌에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발한다. 4월 24일 노사정 대표가 11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4. 사건 결과

문제는 이후에 있다. 당시 박정희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전두환이 막 권력을 잡고 있던 계엄 상황이었다. 전두환 계엄사령부 하의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가혹행위를 했음이 드러났고, 이때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이후 이원갑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21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파업이 끝나자 정선경찰서에 세워진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보안사의 고문기술자들에게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 같은 살인적인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다”(이원갑 증언)

5. 의미

박정희 독재정권과 어용노조 하에서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터진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죽고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저버린 전두환 군부독재가 시작되던 시기의 혼란과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인권마저 유린되던 상황에서 터진 사건으로 그 과정이 과격한 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1980년대 노동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6. 사북 노동항쟁 주역 이원갑

사건 중에 있었던 폭력적인 점 때문에 오랫동안 폭동으로 취급되었으나 지난 2005년 사북 노동항쟁 주역 이원갑 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게 된다.

이원갑씨는 2005.8.16 한겨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증언한다.

“탄광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인 사북 노동항쟁이 폭동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데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해고당하고 징역살고 나오니까, 블랙리스트에 올라 막노동판에서도 잘 안 써줬다, 경제적인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게 가슴이 아프다”

“그 때 동원탄좌 노동자는 3500여명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주민들도 합세해 시위를 벌인 인원은 총 6천여 명에 이르렀다. 사북 항쟁은 독재권력에 항거하고, 부도덕한 기업, 철저하게 어용인 노조와 맞서 싸운 것이며, 당시 신군부의 억압 속에서도 생존권 사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광부들이 더 이상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도록 정부의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그때 고문을 받았던 사람들이 18명쯤 되는데 이들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받았으며 한다. 온갖 고문과 폭행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에게도 적절한 치료와 보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 이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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