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전진의 3대 황제 진세조 (秦世祖) 부견(苻堅)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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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 부견(苻堅, 337년 ~ 385년, 재위 : 357년 ~ 385년)의 자(字)는 영고(永固), 문옥(文玉)이고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선소제(宣昭帝)이다.


부견은 부건(苻健)의 동생 부웅(苻雄)의 아들로 33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영민해 할아버지 부홍(苻洪, 진 태조)의 총애를 받았고 등에 '草付應王'이라는 붉은 글씨가 써 있어 부홍은 이를 보고 성을 부씨(苻氏)로 고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354년 부웅이 전사하자 동해왕(東海王)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357년 왕맹(王猛)을 만나 등용하고, 왕맹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폭군이었던 2대황제 부생(苻生)을 폐위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한다. 즉위 초 부견은 왕맹을 중용해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해 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킨다. 그리고 366년 동진(東晉)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하는 등 적극적으로 외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367년 말 전진의 왕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부견은 왕맹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관중을 통일하였다. 369년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前燕)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자 부견은 왕맹의 진언을 따라 구원군을 파견해 주었다.


북벌군에 타격을 받은 전연이 쇠약해지자 부견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준비하는데 전연의 왕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을 해 오자 이를 받아들였고 369년 말 전연을 공격한다. 370년 왕맹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부견은 왕맹을 사지절·도독관동육주제군사에 임명해 전연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372년 왕맹을 승상으로 삼아 국정 전반을 관리하게 해 전진의 국력은 크게 성장했다. 373년 동진의 양주(梁州 : 산시 성 남부)와 익주(益州 : 쓰촨 성)를 정복했고 전량과 대(代) 등의 여러 지방 세력들도 복속하여 번국이 되었다. 


376년에는 전량과 대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동진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372년에는 승려 순도(順道)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해 주어 고구려에 최초로 불교가 전파된다. 하지만, 375년 왕맹이 병사한 이후 부견은 사치를 일삼고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면서 전진의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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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년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해 1년 동안의 포위전 끝에 점령하였으며, 회수(淮水) 일대도 침입했다. 부견은 복속된 세력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따라 장안 인근에는 선비족(鮮卑族)과 강족(羌族)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고 복속된 세력의 지도자에게 이들을 이끌게 했고 관중의 저족을 화북의 여러 곳으로 이주시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여광(呂光)에게 서역을 정벌하게 하고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96만 명의 대군을 징집해 동진을 공격한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의 국경 전체에 걸쳐서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는데 이를 비수대전(淝水大戰)이라고 부른다. 


부견은 모용수가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병력을 수습하는데, 모용수는 독립할 생각으로 부견을 설득하여 하북으로 향한다. 부견이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관중 지역에서는 부견이 이주시켰던 선비족과 강족들의 지도자인 모용홍(慕容泓), 걸복국인(乞伏國仁)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견은 요장(姚萇)을 파견하여 모용홍을 공격하게 하지만 패배하고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한 요장도 반란을 일으켰다. 


하북 지역에서는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업(鄴)의 부비(苻丕)를 공격하고 각지의 군현들은 후연과 전진의 세력 사이에서 이합집산을 한다. 이후 요장은 후진(後秦), 걸복국인은 서진(西秦), 모용충(慕容沖)은 서연(西燕), 양정(楊定)은 구지(仇池) 등을 건국하여 화북 각지가 분열되고 하남 지역은 동진이 점령해 나갔다.


부견은 주로 서연, 후진 등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385년에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부견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요장의 선양(禪讓) 요구를 거절했다가 신평불사(新平佛寺)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부비는 세조(世祖) 선소제(宣昭帝)로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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