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후연세조(後燕 世祖) 모용수(慕容垂)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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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慕容 垂, 326년 ~ 396년, 재위: 384년 ~ 396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1대 황제로 자는 도명(道明)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무제(成武帝)다.


모용수(慕容垂)는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326년에 태어났다. 모친은 단씨(段氏)이며 원래 이름은 모용패(慕容覇)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고 모용황은 모용패를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태자 모용준(慕容俊)보다 모용패를 더 총애자 모용준은 모용패를 시기하게 되고 이후 모용준이 전연의 2대황제(경소제)로 즉위하자 모용패는 모용준의 견제를 받고 지방으로 좌천된다. 이후 모용패는 낙마하여 앞니가 부러지게 되자 이름을 패(覇)에서 수(垂)로 바꾼다. 모용수의 부인은 단씨(段氏)였는데, 모용준의 황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불화가 있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황후 가족혼씨는 자신의 동생을 모용수의 부인으로 삼았지만 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360년 모용준이 죽자 모용위(慕容暐)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이어 전연의 3대황제가 되고 모용수의 형 모용각(慕容恪)이 정권을 잡게 된다. 모용수는 모용각에게 협력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모용각이 367년에 죽자 모용수는 권력자 모용평(慕容評)의 시기와 견제를 받게 된다. 369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으로 쳐들어오자 모용수는 북벌군을 물리치는 1등 공신이 된다. 이에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모용평과 태후 가족혼씨는 모용수의 암살을 모의하고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 전진(前秦)으로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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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370년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전연의 귀족들을 회유하면서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383년 부견(苻堅)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전하자 대부분의 군대가 와해되었는데 모용수의 부대만 온전히 퇴각에 성공한다.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퇴각하고 모용수는 부견이 몰락한 것을 예감하고 부견을 설득해 업(鄴)에서 북방을 방어하도록 허락받아 부견의 곁을 떠났다. 업에는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가 주둔하고 있었다. 모용수는 모반을 계획한다.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명받아 업에서 출진하였다. 모용수는 감시역으로 파견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으고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해 큰 세력을 만든다.


그리고 384년 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며 후연을 건국했다. 이후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포위하고 1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부비의 수비가 견고해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385년 8월에 부비가 업에서 빠져나가자 업을 점령하였고 황하 이북 일대를 대부분 점령하고 386년 1월에는 황제로 즉위한다. 수도를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정하고 내정을 정비하고 392년 정령족 적교(翟釗)의 적위(翟魏)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西燕)을 멸망시켜 화북 일대를 평정했다. 동진과는 주로 산동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394년 이후 동진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한다.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한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보내 북위를 공격하지만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학살되고, 이에 모용수는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정벌하였다. 평성(平城)을 점령하고 북위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모용수는 전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군대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고 병을 얻고 만다. 이로 인해 북위 정벌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중 진중에서 70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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