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후연(後燕)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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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후연(後燕, 384년 ~ 407년)은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로 국호는 연(燕)이다. 동시대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두 번째로 건국해 후연이라고 부른다. 후연은 고구려 왕족 출신 고운(高雲)이 황위를 찬탈하고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을 세우면서 멸망한다. 정리해 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후연(後燕) 설명


전연(前燕)이 멸망한 후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휘하에서 복무한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수는 이를 기회로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부견을 설득해 곁을 떠나 하북의 업(鄴)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낙양(洛陽) 근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위해 출진한다. 성을 나선 모용수는 감시를 위해 수행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았고 적빈의 군대도 흡수하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용수는 384년 정월 연왕(燕王)으로 즉위하며 후연을 건국한다.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苻丕)가 지키는 업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하북성 대부분을 점령한다. 385년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 하북을 평정한다. 6월에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는데 이에 앞서 후연의 모용수가 모용좌에게 명해 용성(龍城)에 진주하게 한다. 모용좌는 고구려의 군대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시켜 구원하게 했는데 고구려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며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해 11월 후연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고 처음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하여 왔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 


386년에 중산(中山)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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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년 정령족의 적위(翟魏), 394년 서연(西燕)을 멸망시키고 동진(東晉)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한다. 한편 북방의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해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고 탁발규의 북위(北魏)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4년에 북위를 공격하지만 참합피에서 대패하고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지만 도중에 병사한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慕容寶)는 즉위하자마자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다 민심을 잃었고 396년 8월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후연군은 북위의 침입에 거점에서 농성하며 맞섰으나 농성이 길어지자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도 중산을 유지할 수 없었던 모용보는 중산을 버리고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버려진 중산에서는 모용상(慕容詳), 모용린(慕容麟)이 차례로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지만 곧 함락되고 업을 지키던 모용덕(慕容德)은 중산 함락 직후인 398년에 황하 남쪽의 활대(滑臺)로 이동 남연(南燕)을 건국한다. 용성의 모용보는 398년에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진격하던 도중 군대 내부에서 모반이 일어나 쫒겨났고 각지를 떠돌다가 끝내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蘭汗)에게 살해되었다.


난한은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며 후연을 다스렸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은 종친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공포정치를 하고 이로 인해 많은 모반 사건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1년에 모반으로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즉위하는데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402년과 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 요서 일부, 유주지방과 만리장성 일대까지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이에 모용희는 반격을 시도하지만 무리한 작전으로 희생만 컸을 뿐 모두 실패한다. 407년 고구려의 5만 대군이 6개의 성을 점령하자 후연이 멸망 직전으로 가자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慕容雲 : 고운高雲)이 옹립되고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北燕)이 성립한다. 


(일부에서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 정권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후연의 멸망은 고운의 사망 이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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