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북연(北燕) 설명, 북연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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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은 고구려의 왕족 출신 고운이 후연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로 연나라이지만 다른 연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연(北燕)이라고 부른다.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지만, 일부 역사 학자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북연(北燕) 설명

선비족들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는 폭군으로 407년 모용희의 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했는데 이 사건으로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고운)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고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한다. (북연)


후연 시기에 연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08년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고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며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한다.

고운은 친한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강한 권력을 갖게 하였는데 이반과 도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이상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여 그들이 직접 군주가 되려고 409년에 궁전 안의 정원을 거닐던 고운을 공격해 암살한다.


풍발은 고운이 암살된 뒤 일어난 혼란을 평정했고 이반과 도인을 주살했으며 스스로 고운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계속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와 대립한다. 이 북위와의 대립은 풍발이 살아 있을 때만해도 서로 대등한 양상이었으나 풍발이 죽자 북위가 점차 우세해지게 되는데 풍발의 황태자와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어 북연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결국 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연의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케하여 국가의 위기로 이어졌고 한편으론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들어 주었다.


내전 이후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풍홍이 예측한 대로 4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하고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그 백성들을 구출해갔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장수왕을 함부로 대하자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제와 자식을 인질로 잡고 풍홍은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요청을 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시킬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438년에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살해했다. 일부 풍씨 일족들이 살아남아서 북위에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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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北燕) 황제 계보

제1대 혜의황제(惠懿皇帝) 고운(高雲)

연호: 정시(正始) 407년 ~ 409년/ 재위기간407년 ~ 409년

요약: 고운(高雲, ? ~ 409년) 북연(北燕)의 초대 황제로 시호는 혜의제(惠懿帝). 고국원왕 당시 후연(後燕)에 패배해 붙잡혀 온 고구려의 지파 고화(高和)의 손자로 고발(高拔)의 아들이며, 자(字)는 자우(子雨)이다. 모용보의 양자로 모용운(慕容雲)이라 불린다. 후연 2대 황제 혜민제(惠閔帝) 모용보(慕容寶, 재위 : 396년 ~ 397년)가 태자로 있었을 때, 고운은 무관으로 모용보를 섬겼다. 397년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했고 이 공으로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는 한편 모용씨를 하사받아 이후 모용운(慕容雲)이 된다.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후연 4대 황제 모용희(慕容熙)는 폭군으로 풍발 등의 설득으로 모용희를 제거하고 황제로 즉위하고 본래의 성인 고(高)씨로 되돌리고 스스로를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는데 모용씨가 지배하던 시기와 구분해 북연(北燕)으로 구분한다. 고구려와는 동족으로 우애를 가졌고 재위 3년째인 409년 겨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고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풍발이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원황제 (元皇帝) 풍화(馮和): 문성제 추숭

선황제 (宣皇帝) 풍안(馮安): 문성제 추숭


제2대 연태조(燕太祖) 문성황제 (文成皇帝) 풍발(馮跋)

연호: 태평(太平) 409년 ~ 430년/ 재위기간 409년 ~ 430년/능호 장곡릉(長谷陵)

요약: 풍발(馮跋, ? ~ 430년) 자는 문기(文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성제(文成帝). 선조는 춘추전국시기 진나라의 대부였던 필만(畢萬)이고 조부는 풍화(馮和)이며 부친은 서연에서 장군을 역임안 풍안(馮安)이다. 후연의 태합으로 407년 후연황제 모용희(慕容熙)을 폐위하고 북연을 건국하는데 역할을 한다. 고운이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천왕(天王)으로 등극했다. 풍발은 용성(龍城, 현재의 랴오닝 성 차오양)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영유했다. 430년 동생 풍홍(馮弘)이 뒤를 이었다.


제3대소성황제 (昭成皇帝) 풍홍(馮弘)

연호: 태흥(太興) 431년 ~ 436년/ 재위기간 430년 ~ 436년

요약: 풍홍(馮弘, ? ~ 439년)은 북연의 마지막 황제(재위:430년 ~ 435년)로 자는 문통(文通). 시호는 소성제(昭成帝), 430년 풍발(馮發)이 병사하자 풍발의 아우 풍홍과 아들 풍익이 왕위 다툼을 벌였고 풍홍이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다. 풍홍은 화북을 통일한 북위(北魏)의 압박을 받아 436년 고구려(高句麗)에 망명하며 북연은 사실상 멸망한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월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머물도록 하고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자 풍홍은 분개해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하는데 장수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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