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왕 [王, king] 유래 설명

올드코난 2011. 6. 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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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 [, king] 유래 설명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의 최고 통치자.

출처: 브리태니커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로 그 위에 황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세속적 통치자보다 지위가 높았다. 영어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king'을 사용하며, 한국에서는 이를 '' 또는 '임금'이라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용례를 보면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 이래 'Rex'가 왕을 뜻하는 말로 상용되는 등 명칭에 있어서 언어와 역사전통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세계적인 현상의 하나인 왕위는 중세 독일처럼 선출되기도 하나 보통 세습적이며, 두 왕이 공동으로 다스린 고대 스파르타의 양두정치도 있으나 대체로 단일군주제의 형태였다.

왕은 국민과 신 사이의 매개자로 여겨졌고, 고대 수메르에서와 같이 신의 대리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때로는 왕 자신이 신성시되기도 했으며 신의 희생제물로서 왕 자신 또는 공식적인 대리자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요구되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전래된 이러한 신성의 개념은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이었으며, 뒤에 로마 황제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신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며, 중세의 정치이론에서도 왕위는 처음부터 성직과 어느 정도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6~18세기의 절대군주들은 국가주의적인 교회를 세워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왕의 권력이 신보다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왕위가 헌법화되었다
.


동양에서는 중국 은(
)나라의 갑골문에 이미 ''이라는 글자가 나오나, 명칭으로서의 사용은 전국시대인 BC 4세기말에서 BC 3세기초 무렵 조선후(朝鮮侯)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나라를 치려 했던 것이 처음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원시사회가 해체되고 계급분화가 일어나면서 소집단 내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등장해 정복과 복속을 통하여 각 집단들이 더 큰 정치체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성립되었다. 넓은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 지배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해갔다. 왕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그 지위를 표현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왕검'(
檀君王儉)이라는 말은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왕검'을 합쳐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단군을 무당·하늘을 뜻하는 몽골어인 '탱그리'(tengri)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고, 왕검은 왕의 우리말 훈() '임금'과 통하는 것으로 본다. 이후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이 뱃길로 한()나라에 가서 한왕(韓王)을 칭했다는 사실에서 왕이라는 명칭이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각기 고유한 언어로 된 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서
周書〉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의 지배층은 왕을 '어라하'(於羅瑕), 왕비를 '어륙'(於陸)이라 불렀고 일반민은 왕을 '건길지'(鞬吉之)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부여·고구려 계통으로 남하한 백제의 핵심 지배층과 마한의 토착인들 사이에 약간의 언어차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비슷했다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왕을 고유한 언어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건길지를 〈니혼쇼키 日本書紀〉에서는 '코니키시'(Konikisi)라 읽고 있다. '키시' '귀인'(貴人)·'수장'(首長)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 '길사'(吉士 : 吉師)와 통한다. 그리고 ''() '크다'는 뜻이므로 건길지는 '대왕'의 뜻으로도 풀이된다.


신라는 그들 특유의 고유한 왕호를 사용했다. 경주분지의 사로(
斯盧) 소국으로 출발한 이래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차례로 사용했고, 6세기초 지증왕대에 와서 왕이라는 칭호로 굳어졌다. 거서간은 존장자(尊長者), 차차웅은 무(), 마립간은 대수장(大首長)의 뜻을 가진 것으로 신라의 국가성장과 왕권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이 잘 나타난다. 초기 제사장의 기능을 겸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마립간은 광개토왕릉비·봉평신라비 등의 금석문에서는 '매금'(寐錦)·'매금왕'(寐錦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한편 삼국은 국가체제를 갖추어가면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여 '대왕'(
大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경우 주변 소국의 왕이 항복해왔을 때 고구려의 왕이 대왕의 위치에서 그를 왕으로 봉하기도 했다. 백제도 국왕 아래 왕·후()·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 등이 있었다. 봉평신라비·영일냉수리신라비에 의하면, 신라도 국왕인 매금왕 외에 왕에 버금가는 자로 갈문왕(葛文王)을 비롯한 다수의 왕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삼국의 왕명 가운데 고구려의 경우는 장지(
葬地)의 지명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시호제(諡號制)의 시행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장수왕이 죽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라는 시호를 내린 사실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동성왕이 죽은 이후부터 시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제6대 태조왕이 있고, 후대에 주몽(朱蒙)을 태조로 칭한 사례가 있다. 신라에는 〈진흥왕순수비〉·〈문무왕릉비〉에 '태조'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씨집단에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을 추존하여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자신의 부왕인 김춘추에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는 중국식 묘호를 올려 당나라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이러한 묘호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국왕의 묘호를 사용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묘호제에 의하면 창업지주(創業之主)나 두드러진 공이 있는 경우에는 ''(), 수성지군(守成之君)으로 덕이 있을 경우에는 ''()을 붙였다. 고려시대에는 이 원칙에 따라 왕건에게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는 묘호를 붙인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생전에는 국왕이 스스로를 짐(), 후계자를 태자라고 했고, 국왕의 명령을 조(),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는 폐하라고 부르는 등 중국과 대등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간섭기 이후에는 단순히 '모모왕'(某某王)으로 격을 낮춘 시호만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묘호와 시호를 사용했으나 국왕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격을 낮추어 고(
)를 사용했고, 국왕의 명령은 교(), 신하들이 임금을 부를 때에는 전하(殿下), 후계자는 세자(世子)로 불렀다. 그리고 창업지주는 아니지만 국가적 위기를 넘긴 왕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를 사용하기도 했다. 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 등이 그런 경우인데 이 가운데 영조와 정조는 처음에 ''이라 했다가 뒤에 영조·정조로 추존했다. 또 악덕과 부도덕으로 군주의 자격을 박탈당해 폐위된 왕은 격을 낮추어 ''()이라고 했는데 연산군·광해군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 단종도 도중에 폐위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노산군(魯山君)이라고 했으나 숙종대에 와서 추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은 직후부터 재위 연간의 연대기를 편찬했는데 ''의 경우에는 '일기'(日記)라고 했고, 나머지는 '실록'(實錄)이라고 했다.


한국의 왕호는 조선 말기에 와서 변화를 겪었다. 봉건체제를 자주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개항을 맞이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고 이를 진압하면서 수행된 갑오개혁 때부터 왕을 '대군주폐하'(
大君主陛下), 왕비를 '왕후폐하'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을미사변·아관파천 등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자 양반의 유생 사이에서도 칭제(稱帝)의 여론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1897 10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 왕호를 황제라고 고치고 체제를 독립국가로서 새롭게 정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이후 주도적인 국권회복운동·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왕제가 아닌 공화제를 수립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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