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목적

올드코난 2010. 6. 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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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목적

작성자: 이경구

 

. 머리말

. 로마카톨릭 정교의 확인

. 로마교회의 우월권 확보

. 교황의 세속지배권 근거

. 맺음말

 

 

. 머리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에 많은 문서들이 위조되어 왔다. 특히 서양 중세는 위조의 전성기라고 불릴만큼 왕의 칙령, 성직자의 서한 등 많은 문서들이 위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콘스탄티누스 기진장(Constitutum Constantini; Donation of Constantine)은 그 체계나 내용이 매우 조직적이고 정교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원리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위조를 의심하기 어려운 가히 위조문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440년에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 로렌쪼 발라가 이 기진장을 위조문서라고 주장한 이래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서를 놓고 열띤 논쟁을 펼쳤다. 문서의 진위여부로부터 문서의 작성자, 작성시기, 작성장소, 작성목적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논쟁들이 전개되어 왔다. 논의 과정에서 이 문서가 위서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를 의심하는 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 문서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다.1)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사료적 근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가들 사이에 문서가 출현한 정확한 시기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작성의 시기를 스테파누스 2세와 하드리아누스 1세가 교황좌에 있던 기간, 즉 대략 8세기 3/4분기로 보려는 방향으로 사가들의 의견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2)

 

*  전북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시간강사

1) Joseph Canning, A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300-1450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6), p. 73. 

2) Thomas F. X. Noble, The Republic of St. Peter: the birth of the papal state, 680-825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4), p. 135. 기진장의 작성시기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에 관해서, See T. F. Noble, 같은 책, p. 135, no. 173; Rosamond McKitterick, The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751-987 (London:

 

진장의 작성장소는 교황청의 문서국(chancery)일 것이며,3) 작성자는 그 문서국에서 교황문서의 작성을 전담하던 성직자였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대다수이다.

그 동안 학자들간에 논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과를 받아들여, 8세기 중엽에 교황청에서 기진장이 작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렇다면 이 시기에 이곳에서 기진장을 위조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혀보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한 사가는 기진장은 교황청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계획적으로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 라테란의 한 성직자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쓰여진 문학적 오락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지만,4) 기진장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문학적인 오락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논리가 정연하고 내용이 정교하다. 기진장의 내용 자체만이 아니라 그 문서가 작성된 8세기 중엽의 시대상황과 결부시켜 보면 기진장 속에는 시대적 요구가 강하게 배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라이스의 표현대로 기진장의 내용 속에는 곧 그 문서를 작성하였던 작성 주체의 사상과 신앙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보인다.5)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8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상황과 결부하여 기진장의 내용 전체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6)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당시에 교황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었는가? 교황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진장 내용을 분석하여 이어서 그 기진장의 작성목적을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 로마카톨릭 정교의 확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발포한 법률, 혹은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수여한 특허장 형태로 위장되어 있는 이 기진장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의 신앙고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반부와 구체적으로 기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후반부로 나누어진다.7) 종래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로 기진의 문제와 관련된 후반

 

Longman, 1999), p. 48. 

3)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Fuhrmann은 기진장에 관한 한 연구논문에서 위조장소가 교황청의 문서국이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Horst Fuhrmann, "Das frühmittelalterliche Papsttum und die Konstantinische Schenkung: Meditationen über ein unausgeführtes Thema," Settimane di studio del Centro Italiano di studi sull'alto medioevo 20 (1973), p. 264. 

4) P. Ourliac, Review of Fuhrmann 1972-4, Francia 8 (1980), p. 790. 

5) James Bryce, The Holy Roman Empire (New York: The Macmillan Co., 1911), p. 101. 

6) 기진장 내용을 분석하는 데 다음의 사료를 활용하였다. Aemilius Friedberg, ed., Decretum Magistri Gratiani, by Magister Gratianus, Pars Prior of Corpus Iuris Canonici (Graz: Akademische Druck-U. Verlagsanstalt, 1959), Dist. XCVI, c. 14, pp. 342-345; Brunner-Zeumer, Die Constantinische Schenkungsurkunde, translated in Ernest F. Henderson, Select Historical Document of the Middle Ages (London: George Bell, 1910), pp. 319-329. 

7) Joseph R. Strayer ed.,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89), s. v. "Donation of Constantine," by John Van Engen, p. 257.

 

부의 내용에 주목해왔다. 굳이 그 비중을 따진다면 기진의 문제를 다루는 후반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반부가 중요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전반부에서는 주로 기독교 신앙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후반부와 논리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기진장의 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은 로마 카톨릭 정교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성자는 먼저 삼위일체를 정통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을 통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이 거듭 강조된다. 성스럽고 분리할 수 없는 성부성자성령 이 삼위의 이름으로…’,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만물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공급자인 성령을 믿습니다, 짐은 완전한 삼위일체 속에서 신앙의 충만함과 권능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성부와 성자, 성령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아버지가 신이고, 아들도 신이고 성령도 신입니다. 그리고 이 셋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속에 삼위가 담겨있으며, 셋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진장 전반부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이다. 기진장의 작성자는 문서의 첫머리부터 삼위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전반부가 끝날 때까지 삼위일체를 거듭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삼위일체를 강조하였을까?

니케아 공회의(325)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삼위일체를 믿는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선언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는 개종하지 않은 채 반발하였다. 이단으로 몰려 제국의 주변부로 밀려난 아리우스파는 이민족들, 특히 게르만족을 상대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프랑크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으며, 게르만족의 이동과정에서 아리우스파 신앙은 더욱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서로마제국 몰락 이후 로마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이단의 문제였다. 특히 6세기말부터 아리우스파 신앙을 가진 롬바르드족이 북부 이탈리아 지역으로 침략해 오자 교황은 신앙의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롬바르드인들이 반도를 지배한다는 것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종말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교황들은 한편으로 비잔틴 황제와 협력하여 이들의 세력팽창을 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롬바르드 점령하에 있는 지역의 성직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서 이들을 정통으로 개종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8세기 전반기에 그 숙원을 이루게 되었지만 이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부단한 노력과 시련을 요하는 매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였다. 6세기말부터 시작하여 8세기 전반기에 롬바르드왕 리우트프란트가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이단의 문제가 일단락 될 때까지 로마교회의 역사는 실로 아리우스파 이단과의 갈등의 역사였다.8)

이단의 문제는 교황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다. 이단을 퇴치하고 로마교회가 하나의 정통으로 통일되지 않는 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요컨대 기진장에서 삼위일체를 강조한 이유는 8세기 중엽 당시까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이단 아리우스파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 정통인 아타나시우스파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기독교 황제이면서, 삼위일체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니케아 공회의를 주재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신앙을 강조하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기진장의 저작자는 판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위일체와 더불어 기진장의 전반부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로마 교황의 교리가 정통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교황 실베스테르로부터 배웠던 종교적 신조, 짐의 아버지이며 스승인 주교 실베스테르가 짐에게 가르쳤던대로, 짐은 아버지인 실베스테르의 설교를 통해서 그 분을 알게 되었으며, 아버지 실베스테르가 짐에게 가르쳐준 정통의 교리, 짐의 아버지 실베스테르가 설교하는 그 분을 숭배할 것을 명하노라’

이상의 표현들 속에 드러나듯이 위작자는 황제 콘스탄티누스로 하여금 교황 실베스테르를 그의 스승이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제국의 모든 백성들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실베스테르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기진장의 작성자는 삼위일체 이론과 더불어 교황 실베스테르의 교리를 정통이라고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왜 이렇게 위작자는 교황의 교리를 정통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 이러한 표현들 속에도 기진장을 작성하던 당시 교황청의 요구와 필요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8세기 중엽에 아리우스파 이단의 문제와 더불어 교황청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가 비잔틴교회와의 교리문제였다. 726년에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발포한 이후 성상의 파괴와 숭배에 관한 문제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간 첨예한 대립의 문제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와 3세는 노골적으로 비잔틴 황제의 성상파괴주의에 반대하였다. 교황들은 로마교황의 신앙과 교리를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비잔틴 황제의 성상파괴주의를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성상파괴주의로 인한 동서교회간의 충돌은 이론적 대립을 넘어서 기독교 세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 때문에 교황들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투쟁하였던 것이다.9)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은 콘스탄티노플과의 이론적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동시에 교황의 교리로 교회를 통일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즉 로마 교황의 교리를 정통으로 확인할 절실한 필요에 직면하였다. 그 필요성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을 통해서 교황의 교리를 정교라 선언하도록 하였고, 제국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 교리에 따르도록 명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른 나라 사

 

9) Raymond Davis, The Lives of the Eighth-Century Popes (Liber Pontificalis): The Ancient Biographies of Nine Popes from AD 715 to AD 817,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in Translated Texts for Historians Vol. 13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92). pp. 11-16, 19-21.

 

람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특히 비잔틴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진장에서 콘스탄티누스를 가장하여 정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교황에게 비잔틴 교회의 성상파괴주의에 반대하고 카톨릭 신앙의 교리를 규정하고 통제할 교황의 구속받지 않는 권리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10)

 

. 로마교회의 우월권 확보

 

그런데 교황의 교리를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선언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교황이 지도하는 로마교회의 우월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교회의 우월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교회와 다른 로마교회의 특이한 전통과 이론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위작자는 최고의 두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 두 사도 중에서도 특히 사도중의 사도로 알려진 베드로의 권위를 더 강조하였다. 꿈속에서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계시를 받아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문둥병 치료의 기적이 일어났다. 세례를 받고 문둥병이 치료된 다음 날 실베스테르는 설교를 통해서 베드로의 권능을 설명하였다. 기진장에서 구체적으로 마테복음 16 19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삼위일체 이론과 정교에 관한 이론이 전반부에서만 특별히 강조되는데 반하여 베드로의 권위에 대해서는 전후반부를 가릴 것 없이 계속해서 강조된다. 아니 오히려 후반부의 기진 부분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베드로의 이름이 등장한다.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 나의 주인이신 성 베드로와 바울 등의 표현이 줄곧 사용된다.

기진장에서 이렇게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교회가 교회들 중에서 수위성을 차지하기 위한 확실한 근거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의 권위는 구체적으로 성서에 근거가 명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사도 중의 사도가 베드로이다. 만일에 이 베드로를 제1대의 로마주교로 볼 수 있다면, 그래서 로마주교가 그 베드로를 계승하는 정통의 계승자라고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로마주교가 다른 모든 주교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주교의 관할하에 있는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들 중에서 중심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로마주교가 모든 주교들 위에 수위성을 차지하려는 의도는 또 다른 위조문서인 베드로 계승이론에 관한 문서에서 이미 드러났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로마의 주교들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국내 각 지역 교회간에 아직 뚜렷한 서열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역대의 교황들은 베드로 계승이론에 관한 이 위조문서에 근거하여 줄곧 로마주교가 베드로의 계승자임을 주장해 왔다.11) 베드로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교황

 

10) T. F. Noble, Republic of St. Peter, p. 137.

11) 이경구, ꡔ중세의 정치 이데올로기 (서울: 느티나무, 2000), 24-31 .

 

의 권위가 높아지고 교회의 대표성이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 계승이론에서 의도하였던 교황들의 그 목적이 이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은 기진장에서 베드로와 교황을 거의 동일시하는 표현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기진장의 전반부에서 위작자는 그리스도의 최고 사도들로서의 베드로와 바울의 권능을 주로 설명한다. 일단 베드로의 지위와 권능을 설명한 다음 후반부의 기진 부분에서 작성자는 베드로와 교황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표현들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가장 성스런 베드로의 자리가 더욱 우러름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황제의 권한과 영광을’, 베드로의 자리에 않게 될 베드로의 계승자들에게, 황제는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에서 교황이 탄 말의 굴레를 잡고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교황이 베드로의 직접 계승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위작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교황의 자리를 베드로의 자리와 동일시하도록 함으로써 결국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교황의 권위와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황에 대한 호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황 실베스테르를 칭할 때 극존칭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가장 성스럽고 축복받은 아버지 중의 아버지인 로마주교 실베스테르, 최고의 주교이며 보편교황인 짐의 아버지 실베스테르, ‘짐이 존경하는 최고의 아버지이며 스승인 주교 실베스테르 등 교황을 칭하는 최상급의 호칭이 기진장의 마지막까지 줄곧 사용된다. 기진장의 전반부에서 보편교황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후반부에서는 베드로 계승자, 혹은 베드로의 대리자로서의 교황의 지위를 강조하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위작자는 로마황제가 교황에게 극존칭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노골적으로 사도들이 세운 5대 교회인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교회 중에서 로마교회가 우월권을 가진다고 표현하였다. 그 우월권의 근거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서 사도직을 맡았던 그 자리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우월한 교회의 지도자인 로마주교 역시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교회의 수장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교회의 주교보다 더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기진장을 통해서 교황은 전세계에서 다른 모든 주교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교황의 우월권이 확인되었다.12) 콜먼의 표현대로 모든 성직자들의 수뇌요 다른 4명의 수좌대주교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교회의 최고자로서의 교황의 특권이 이 기진장을 통해서 법적으로 확인되었다.13)

교황의 지위를 최고도로 끌어올리려는 위작자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교황을 교회의 수장 지위에 올려놓는 차원을 넘어서 기진장에는 실로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한 지위가 표현되어 있다. 카알라일은 기진장의 작성자가 세속권에 대한 영적 권위의 우월성을 표현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14) 그러나 이렇게

 

12) J. Canning,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p. 73.

13) Christopher B. Coleman, The Treatise of Lorenzo Valla on the Donation of Constantine: Text and Translation into English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3), p. 1.

 

볼 경우 기진장의 뒷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짐은 순금의 왕관을 벗어 손수 교황에게 씌우려 하였으나, 교황은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쓰고 있는 면류관 위에 왕관을 씌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짐은 성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에서 교황이 탄 말의 굴레를 잡고 가는 마부의 예를 수행하였다. 교황관 위에 황제관을 씌우는 것을 거절하였다는 표현 속에는 교황의 우월권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황제가 마부로서 교황이 탄 말을 끌고 갔다는 것은 권위의 문제를 넘어서 황제는 교황의 종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위작자는 교황의 우월권 차원을 넘어서서 황제를 비하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진장에 황제보다 교황의 우월한 지위가 표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기진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최고의 주교가 오히려 세속의 지배자보다 훨씬 더 큰 권한과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짐은 아버지인 보편교황 실베스테르에게 짐의 궁전은 물론, 로마시와 모든 속주, 이탈리아와 제국 서부지역의 지방과 도시들을 양도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다. 세속의 지배자보다 더 큰 권한과 영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작자는 노골적으로 황제보다 교황의 우월한 권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브라이스가 기진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은 종교사회의 수장이 세속 사회의 수장도 동시에 겸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내린 해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15) 또한 황제보다 교황이 우월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기진장 속의 이러한 표현은 730년대 이래의 베드로 공화국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16) 베드로로부터 물려받은 공화국을 지배할 권한은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황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황제의 권한을 배제하고 교황이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현실적인 욕망이 이 내용 속에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교황의 우월한 권위를 제창하는 과정도 또한 매우 논리적이다.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한 다음 그의 계승자로서의 교황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모든 주교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아가 최고의 주교인 교황은 황제보다도 더 높은 지위를 누린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기진장의 작성자는 교황을 모든 가능한 경쟁자보다 우월하게 만들었다.17)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교황에게 황제가 제국의 모든 것을 양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즉 기진의 정당성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위작자가 교황의 보편적 권위를 강조한 궁극적 의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함으로써, 그 신앙의 대표자로서의 교황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교황의 보편적 지위가 강화됨으로써 기증의 당위성이 커질 수 있었던 것이다.

 

. 교황의 세속지배권 근거

 

14) R. W. Carlyle and A. J. Carlyle, A History of Mediaeval! Political Theory in the West, Vol.: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from the Roman Lawyers of the Second Century to the Political Writers of the Ninth (New York: Barnes & Noble, n.d.), pp. 287-288.

15) J. Bryce, Holy Roman Empire, p. 101.

16) T. F. Noble, Republic of St. Peter, p. 137.

17) Henry A. Myers, Medieval Kingship (Chicago: Nelson-Hall, 1982), p. 129.

 

교황의 우월한 권위의 토대 위에 기진장의 작성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적은 교황의 세속적 지배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가들은 기진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실베스테르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황제의 모든 권리를 양도하는 대목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기진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진장의 앞부분은 이 극적인 권리양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절차 및 단계였다고 할 수도 있다. 양도의 절차가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극적이다.

기진은 문둥병을 치료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로마에 성 베드로와 바울의 교회를 세우고 이 두 교회가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토지재산을 증여하였다. 제국의 동서남북에 있는 각 지역, 즉 유대, 그리스, 아시아, 트라키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지역과 여러 섬까지 증여한 후 실베스테르와 그의 계승자들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다시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과 왕관, 그리고 망토, 튜닉, 휘장 등 몸에 부착하고 있는 왕권의 상징물은 물론 왕홀과 제국기에 이르기까지 황제가 지닌 모든 것을 양도하였다.18)

콘스탄티누스는 로마교회에 봉사하는 성직자들에게도 원로원이 누리는 특권과 영광을 누리도록 할 것을, 로마 귀족과 집정관과 같은 대우를 받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교황들에게 이들 성직자들과 심지어 수도사들까지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왕관을 벗어 직접 교황에게 씌우려고 하였으나, 실베스테르는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쓰고 있는 성직자의 면류관 위에 왕관을 씌우는 것을 거절하였다.19)

다시 콘스탄티누스는 교황에게 로마시와 이탈리아, 나아가 제국의 서방지역 전체를 양도하였다.20) 이렇게 모든 것을 교황에게 기진하고 난 다음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의

 

18) 콘스탄티누스가 실베스테르에게 황제가 지닌 모든 것을 양도하였다는 이 내용은 2가지의 상반된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황제가 모든 권한을 교황에게 양도하였기 때문에 황제권의 소유주는 교황이며 이후의 황제권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해석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로 제국의 본래 주인인 황제가 교황에게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교황의 모든과 지위는 권한은 황제로부터 파생된다는 해석이다. 이후의 교황들은 후자를 차단하기 위해 부심하였다. 특히 13세기에 교황 Innocentius 3세와 4세는 유명한 반환논리(Restitutionstheorie)를 전개하였다. 즉 황제가 교황에게 권한을 준 것이 아니라 본래 신이 교회에 준 것을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반환하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Wolfram Setz, Lorenzo Vallas Schrift gegen die Konstantinische Schenkung: Zur Interpretation und Wirkungsgeschichte (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75), p. 19.

19) 교황이 왕관을 거절하였다는 표현은 위작자가 저지른 실수 중의 하나이다. 왕관은 세속적 권한을 상징하고 면류관은 영적인 권한을 상징한다. 실베스테르가 왕관을 포기하고 면류관으로 만족하였다고 한다면 왕관은 여전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것인 셈이다. Robert Folz, The Concept of Empire in Western Europe: from the Fifth to the Fourteenth Century, trans. Sheila Ann Ogilvie (London: Edward Arnold, 1969), p. 12. 물론 교황관 위에 왕관을 두기를 거절하였다는 이 표현의 직접적 의도는 교황 우월론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의 황제관을 거절하고 교황의 면류관으로 만족하였다고 표현함으로써 기진장의 작성자는 교황의 권한은 영적인 분야에만 국한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논란의 소지를 남겨놓았다.

 

지배자의 뜻에 따라서 교황이 다스리는 곳에서 세상의 지배자가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제국의 중심을 비잔틴으로 이전하여 자신은 그곳에서 왕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하였다.21)

 

이상의 기진장 내용을 놓고 이 문서의 작성목적에 관해서 종래 많은 사가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창해왔다. 먼저 기진장의 작성목적을 비잔틴인들이 지배하고 있다가 롬바르드인들에게 내주었던 지역, 즉 라벤나 태수관구나 그 주변지역에 대하여 교황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려는 견해이다. 카알라일은 기진장은 이탈리아에 있는 비잔틴 영토, 그 중에서도 특히 태수관구를 교황이 확보하는데 필요한 근거로서 작성되었다고 보았고,22) 브라운도 라벤나 지역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고 보았으며,23) 마이어스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잔틴 제국과 지배권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 아마도 베니스, 라벤나, 그리고 아드리아해안 지역에서 교황의 입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근거로서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24)

물론 8세기 중엽에 교황들이 라벤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한 것은 사실이다. 742년에 롬바르드 왕 리우트프란트가 라벤나 지방을 봉쇄한 후 침략을 감행해 왔을 때 롬바르드 왕을 만나 그 지역을 구한 인물이 교황이었다. 리우트프란트의 대대적인 공격 앞에서 군사적 대응능력을 결한 라벤나 태수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해왔고, 교황 자카리아스는 그 요청에 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롬바르드 왕을 만나 라벤

 

20) 제국의 동서남북을 다 주고, 다시 로마와 이탈리아, 서부지역을 기증하였다는 표현 또한 논리적으로 보면 오류이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강조하기 위해서 로마와 이탈리아, 서부지역을 재차 기증하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복법을 쓰고 있는 것이 이 기진장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21) Myers는 콘스탄티누스가 일단 제국의 동서남북을 교회에 다 주고 다시 자신의 세속권의 지리적 중심을 제국의 서부에서 동부로 이전하였다는 내용 속에는 모순이 담겨있다고 지적하였다. H. A. Myers, Medieval Kingship, p. 130. 그러나 Ullmann은 이 부분을 달리 해석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었기 때문에 이제 제국의 주인은 교황이라는 것이다. 실베스테르가 왕관을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이미 황제가 준 것이기 때문에 왕관은 교황의 것이 되었고, 따라서 제국을 동부로 이전한 이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관을 쓴 것은 교황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기진장과 더불어 이후의 황제들은 교황의 허락을 받아 황제관을 쓸 권리를 갖게 된 셈이며, 이로써 결과적으로 황제권과 교황권이 완전히 전도되기에 이르렀다고 울만은 해석하였으나, Walter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New York: Barnes & Noble, 1953), pp. 82-83. 이러한 해석은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Myers의 지적처럼 이 표현 속에는 논리적 모순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표현을 통해서 여기서 위작자가 의도한 것은 아마도 황제는 제국의 중심을 비잔틴으로 이전하였으니 이제 비잔틴 지역에 대한 권리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이탈리아와 서양 기독교 세계에 대한 비잔틴 황제의 권리 주장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2) R. W. Carlyle, History of Mediaeval! Political Theory p. 288.

23) T. S. Brown, "The Church of Ravenna and the Imperial Administration in the Seventh Century," English Historical Review 94 (1979), p. 27.

24) H. A. Myers, Medieval Kingship, p. 130.

 

나 지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25) 다시 751년에 아이스툴프 왕이 라벤나 태수관구와 그 일대를 정복했을 때에도 비잔틴 황제는 교황을 통해서 라벤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이 지역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롬바르드 왕과 직접 협상한 장본인이 교황이었다.26) 왕과의 협상에 실패하자 프랑크인들에게 눈을 돌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인물도 교황이었다.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몸소 피핀을 찾아가 롬바르드인들로부터 라벤나 지역과 교회영토를 회복해 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이다.27)

이렇게 라벤나 지역이 롬바르드 왕들에게 유린당할 때, 그 지역을 방어하거나 회복하기 위하여 직접 행동한 인물이 교황이었고, 그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기진장에 반영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라벤나 지역에 대한 권리증거로 삼기 위한 것만이 기진장의 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보려는 견해는 기진장을 작성한 목적의 일부는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보다는 기진장의 작성자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세속지배권을 교황에게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서로마제국 몰락 이후부터 교황은 종교적 지도자로서 이탈리아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왔다. 7세기 중엽이후 이슬람인들의 압박을 받아 비잔틴 세력이 콘스탄티노플 주변으로 축소되면서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비잔틴 황제의 공백을 대신하여 세속문제에 간여하기에 이르렀다. 8세기초까지는 여전히 형식상 비잔틴 황제의 대리자인 라벤나태수의 명을 받아서 행정문제를 처리하였지만 로마공국 및 그 주변에서 서서히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가 성상파괴문제로 비잔틴 황제와 정면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에 맞섰으며, 그 지지를 바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28)

하지만 비잔틴과의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빚던 그 과정에서 교황은 궁극적으로 황제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로마교회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당연히 황제가 종교의 최고 수뇌라고 간주하는 황제교황주의 앞에서 어떻게 로마교회의 독립이 가능하단 말인가?

더구나 8세기 중엽 롬바르드왕들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위협해왔을 때, 비잔틴 황제의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교황들은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29)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교황은 당시 확고한 지배권을 누리고 있는 로마공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라벤나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체에서 실질적 주인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을 이탈리아에서

 

25) Liber Pontificalis, pp. 36-43.

26) 같은 책, pp. 55-56.

27) 같은 책, p. 63.

28) 같은 책, pp. 10-13.

29) 같은 책, p. 36. Liutprand 741년에 로마공국 주변으로 공격해왔을 때 교황 Zacharias는 그 왕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협상을 통해 점령지역을 되돌려 받았다. 이 사건은 교황이 로마공국의 대표로서 제국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외교 업무를 착수한 최초의 예이다. 같은 책, p. 36. no.18.

 

황제의 행정관리 정도로 생각하는 비잔틴 황제의 제국이념 앞에서 어떻게 교황이 이탈리아의 세속적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잔틴 황제는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탈리아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리를 주장하였다. 고대 로마제국을 정통으로 계승하는 황제의 자격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비잔틴 황제가 이론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이 황제를 대신해서 이탈리아를 지배할 근거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은 비잔틴에 맞서 이탈리아에 대한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절실한 필요의 산물이 기진장이었다. 그러므로 기진장은 작성 당시 이탈리아에서 교황청이 누리고 있던 세속적 지배권 혹은 앞으로 누리고자 하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런데 교회의 대표자가 세속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였다. 누구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 세속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계적 권위를 지닌 로마황제와 같은 높은 지위와 권위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위작자는 교황을 이탈리아에서 황제권의 소유자로, 그리고 영토의 합법적 주인으로 묘사하였다.31) 즉 기진장에서 세속황제가 입고 있는 영광의 옷을 그대로 교황에게 입혔던 것이다. 기진장에서 실베스테르 교황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왕관과 제국의 모든 상징물을 받음으로써 황제와 동일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을 인수받음으로써 황제의 정통 계승자로서 황제처럼 제국을 지배할 수 있는 세속권을 지니게 되었다.32) 이로써 교황은 이탈리아를 세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자격을 완전하게 갖춘 셈이다.

비잔틴 황제가 권리를 주장한 곳이 라벤타 태수관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비잔틴의 권리에 대항하여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세속적 지배권을 세우려면 당연히 반도 전체에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기진장에서 로마시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표현 속에 바로 이러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고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방지역을 교황에게 전부 양도한 다음 비잔틴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자신은 그곳에 살기로 결심하였다는 표현 속에도 이탈리아 전체에 대한 교황의 권리 주장이 담겨있다.33)

비잔틴인들과의 대립과정에서 교황청에서는 이들로부터의 독립을 꾸준히 추진해왔으며, 기진장은 바로 이 교황청의 정책, 요컨대 비잔틴 황제의 대권을 황제로부터 교

 

30) T. F. Noble, Republic of St. Peter, p. 137.

31) Johannes Haller, Das Papsttum: Idee und Wirklichkeit, Bd.: Die Grundlagen (Rowohlt, 1965), p. 317.

32) R. Folz, Concept of Empire, pp. 11-12.

33) 기진장에서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 위하여 동부로 출발한 그 시점을 연대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H. A. Myers, Medieval Kingship, p. 129. 수도의 천도라는 역사적 사실이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이용되었던 것이다.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 82.

 

황에게 이전함으로써 교황이 이탈리아 전체를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로서 작성되었다.34) 즉 기진장 작성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틴 세력을 배제하교 교황에게 비잔틴인들의 합법적인 상속자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35) 따라서 기진장의 작성목적을 단순히 비잔틴 지배하에 있던 태수관구나 그 주변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의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잔틴을 대신하여 교황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세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의 증거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36)

 

그렇다면 기진장이 단순히 비잔틴인들만을 대상으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8세기 중엽에 지난날의 라벤나 태수관구와 비잔틴 지배하의 로마공국에 황제권력의 공백이 있었고, 기진장의 저자는 그 공백을 교황으로 채웠다. 그러나 위작자는 공백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행동을 하였다.37) 즉 프랑크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진장에 프랑크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진장이 작성되던 8세기 중엽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 즉 교황청과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왕국, 그리고 교황청과 프랑크 궁전간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보면 기진장의 작성자는 프랑크인들을 의식하였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롬바르드인들이 북부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삼아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지배력을 확대해 왔을 때 교황은 지위의 위태로움을 느꼈다. 교황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롬바르드왕들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들의 군사력 앞에서 협상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교황청은 당시 유럽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급속히 부상하는 프랑크인들을 주목하였다. 롬바르드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실질적 군사력이 필요하였고 당시로서 그 물리적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프랑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교황 자카리아스가 피핀의 쿠데타를 지원한 것도 프랑크 세력과의 제휴를 통해서만이 이탈리아에서 교황이 그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38) 자카리

 

34) C. B. Coleman, Treatise of Lorenzo Valla, p. 8.

35) R. Folz, Concept of Empire, p. 11.

36)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기진장은 교황에게 비잔틴 황제와의 갈등을 정당화해 주는 문서로 보았던 Southern의 견해나, Richard W. Southern, Western Society and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Penguin Books, 1970), p.92. 제국의 법률적 구조로부터 교황의 해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고 본 Ullmann의 주장,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 81. 그리고 교회재산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확인하기 위한 것, 즉 이탈리아에 대한 비잔틴의 권리주장에 맞서 교회재산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지지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성되었다고 본 Canning의 주장, J. Canning,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p. 73. 모두가 타당성이 있다고 보인다. 

37) Margaret Deanesly, A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476 to 911 (New York: Barnes & Noble, 1956), p. 292.

 

아스가 만들어 놓은 외교의 다리를 건너 스테파누스는 직접 피핀의 궁전으로 행차하였다. 프랑크로 피핀을 찾아가기 전에 교황은 피핀을 만나 펼쳐놓을 여러 가지 준비물을 사전에 마련하였다. 그 준비물 중의 하나가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테파누스 방문의 일차적 목적은 롬바르드인들의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문의 목적은 그 이상이었다. 롬바르드인들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한 후에 롬바르드인들의 점령하에 있던 영토를 교황이 되돌려 받는 것 그것이 본질적 목적이었다. 이론대로라면 롬바르드인들이 정복한 지역을 본래 영토의 주인인 비잔틴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적인 차원에서 상호경쟁관계에 있는 비잔틴인들에게 그 영토를 돌려준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적었다. 그 보다는 정복자로서 프랑크인들이 그 영토를 취할 가능성이 더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영토의 주인이 교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스테파누스 전기에 따르면 754년초 스테파누스가 폰티온 궁전에서 피핀과 만났을 때, 교황은 피핀에게 교회의 영토를 롬바르드인들로부터 되찾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피핀은 라벤나 태수관구와 교회의 영토를 회복(redere, return)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39) 반환이나 회복이라는 표현은 본래 주인의 것을 되돌려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스테파누스는 이탈리아를 기본적으로 교황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가 없이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외교관계에서 근거가 없이 막연하게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롬바르드인의 침략으로 로마공화국이 사라질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고 프랑크인들이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롬바르드인들을 퇴치하고 나면 그 영토를 취해갈 수 있는 위험성 앞에서 교황이 막연하게 프랑크인들의 교황에 대한 존경과 호의에만 기대를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랑크인들과의 관계에서 교황이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이 피핀에게 본래 교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40) 이러한 점에서 기진장은 8세기 중엽의 프랑크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절실한 필요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41) 따라서 기진장은 피핀에게서 교회의 영토를 회복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38) 이경구,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중심으로」, ꡔ서양중세사연구 8 (2001), 15-17 .

39) Liber Pontificalis, p. 63.

40)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 58.

41)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할 과제이지만 기진장은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프랑크 궁전을 방문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던 753 10 14일 이전에 이미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피핀과 스테파누스가 최초로 상봉하였을 때 피핀이 교황에게 보였던 마부의 예가 기진장이 작성된 시기를 스테파누스의 프랑크 방문 이전으로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M. Deanesly,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p. 292-293;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p. 58-75. 이와 반대로 Laehr는 기진장은 스테파누스가 피핀을 방문한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피핀이 스테파누스에게 보였던 마부의 예가 기진장에 반영되었다고 해석하였다. Gerhard Laehr, Die Konstantinische Schenkung in der abendlandischen Literatur des Mittelalters b

 

위한 증거로서,42) 혹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피핀에게 증명하기 위하여,43)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테파누스는 피핀을 찾아가 기진장에 의거하여 이탈리아에서 교회재산을 회복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후에 피핀이 원정을 지연하자 스테파누스는 계속해서 약속을 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진장은 피핀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도록 요구할 수 있는 법률적, 역사적, 문헌적 정당성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44) 이 기진장에 근거하여 교황들은 카롤링 통치자들로부터 이탈리아에 있는 땅들에 대하여 교황의 권리를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754년 피핀이 롬바르드인들로부터 빼앗은 땅들을 교회에 되돌려 준 것과 이후 774년에 샤를마뉴가 피핀의 기증령에 새로운 땅을 추가하여 교회에 기증한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45)

이상과 같이 기진장은 일차적으로 비잔틴을 상대로 하여 이탈리아의 주인은 교황이라는 교황의 권리주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근거로 작성되었지만, 동시에 프랑크인들을 대상으로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전에 비잔틴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광활한 영토를 소유할 자격을 법률적으로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프랑크인들에게 증거로 제시하기 위하여 기진장이 작성되었다.46)

 

이렇게 기진장은 이탈리아반도에 대하여 비잔틴인들과 프랑크인들을 상대로 교황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서부지역에 대한 교황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리의 증서로서 작성되었다고 보인다. 우선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가 위작자의 직접적인 관심사였음에 틀림없다. 그런

 

abendlandischen Literatur des Mittelalters bis zur Mitte des 14. Jahrhunderts (Berlin: Verlag Emil Ebering, 1926), p. 6.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피핀이 교황에게 약속했던 로마교회 영토의 회복, 피핀과 그의 아들들에게 교황의 도유와 왕권의 확인, 그리고 로마귀족이라는 칭호의 수여 등 일련의 획기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남는다.

42) W. Levison, "Konstantinischen Schenkung und Silvester-Legende," Miscellanea F. Erhle II (Rome 1924), pp. 159-247, R. McKitterick,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p. 48, no. 24에서 재인용. 반면 쉐퍼 보이호르스트는 프랑크 왕에 대해서 태수관구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증거로서 위조되었다고 보았다. Scheffer-Boichorst, "Neuere Forschungen über die konstantinische Schenkung," Mitteilungen des Instituts für  Österreichische Geschichtsforschung 11 (1890), pp. 128-146, R. McKitterick,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p. 48, no. 23.에서 재인용. 그러나 피핀에게 태수관구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내세우기 위해 위조했다는 이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 같다. 앞서 비잔틴을 상대로 의도한 권리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였듯이 프랑크인들에게 요구한 것도 이탈리아 전체였다. 실제로 스테파누스가 피핀을 만났을 때 요구한 것은 태수관구의 회복만이 아니라 교회영토의 회복이었다. Liber Pontificalis, p. 63.

43)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 81.

44) R. McKitterick,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p. 47.

45) J. Canning,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p. 74.

46) R. W. Southern, Western Society and the Church, p.92.

 

데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데는 비잔틴인들이 직접적인 방해물이었기 때문에 교황과 비잔틴과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비잔틴과의 관계를 정리를 하고 나면 다시 프랑크인들이 부담스런 존재로 남았다. 프랑크인들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기진장의 작성자는 로마시, 이탈리아, 특히 제국의 서부지역 전체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부지역이 오랜 발전의 과정에서 로마주교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47)

그러나 기진장의 궁극적 목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마, 이탈리아, 서부지역을 강조한 것은 그곳이 교황권위의 직접적인 기반이었기 때문이고, 기진장에서 작성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교황의 세계 지배권이었던 것 같다. 즉 기독교 세계 전체 혹은 여타 지역을 포함한 세계 전체의 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원대한 목표는 기진장의 내용 속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동서남북에 있는 각 지역, 즉 유대, 그리스, 아시아, 트라키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지역과 여러 섬까지 교회에 증여한 후 교황 실베스테르와 그의 계승자들이 다스리도록 하였다. 다시 교황에게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서부세계 전체를 기증하였다. 기진장과 더불어 이제 교황은 로마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48)

고대 로마제국은 세계제국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세계관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동서남북을 교회에 주었다는 것은 곧 전 세계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 영토적 한계가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로마제국은 세계를 대표하였다. 성 제롬의 해석에 따라서 로마제국은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었으며, 로마제국의 멸망은 곧 지상국가의 멸망과 신국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로마제국은 곧 세계제국이기 때문에 제국의 동서남북을 주었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모두 주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로마와 라테란 궁전을 교황에게 주었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중세적인 사고로 볼 때 로마는 단순한 이탈리아의 한 도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세속적 차원에서 볼 때, 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축도였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신성한 도시이며, 신국의 상징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로마를 교황에게 주고 이곳에서 제국의 각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은 곧 전 세계를 교황에게 주고 전 인류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진장의 앞부분에서 교황의 권위를 최고도로 올려놓고, 황제와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로 승격시킨 점과 이 부분을 연결시켜 보면 이러한 확대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기진장과 더불어 교황은 제국의 중심지에서 세계의 지도자로 출현하였다. 노블은 기진장이 실제적정치적사법적 의미를 갖지 않고 작성되었다고 보았으며,49) 넬슨은 기진장이 로마 주변에서 정치적인 질서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나 교황의 이념적 해결의 필요성 때문에 고안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50) 이러한 견

 

47) R. Folz, Concept of Empire, p. 11.

48) G. Laehr, Die Konstantinische Schenkung, p. 6. 

49) T. F. Noble, Republic of St. Peter, p. 136.

 

해는 잘못인 것 같다. 물론 기진장은 역사를 가장한 이론이다. 그러나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진 정교한 이론이었다. 교황의 세계지배라는 실제적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조되었다. 따라서 위조 주체의 대담성과 상상력이 빚어낸 정치적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51) 기진장의 작성자는 역사적-정치적 로마주의를 교황의 이데올로기와 접목시켜,52) 최초의 기독교 황제 입을 통해서 중세 교황권의 모든 기본적 이념을 제창하였다. 따라서 기진장은 8세기 중엽에 교황청에서 추구하였던 목표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견해를 제공해 준다.53) 요컨대 최초의 기독교 황제의 말이나 행위로부터 교황이 이미 소유하고 있어나, 혹은 앞으로 획득하고자 하는 모든 권리의 증거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진장의 목적이었다.54)

기진장 속에는 이렇게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원대한 계획이 담겨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은 자칫 그 사실을 의심받기 쉽다. 기진장의 작성자는 이 점까지도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게 콘스탄티누스는 이후의 모든 계승자들과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강령을 위반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위반할 경우 저주를 받을 것이며 지옥에 가서 멸망할 것이라고 신의 이름으로 무섭게 경고한다. 그리고 이 문서를 엄숙하게 베드로의 시신에 바치면서 기진장은 마무리된다.

 

. 맺음말

 

이상으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기진장은 그 전체 내용이 매우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면서 반복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반부의 콘스탄티누스 신앙고백 부분에서 보면, 처음에 하나님의 권능을 설명하고, 다음 삼위일체의 이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설명한 후, 다시 성경의 구체적인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를 등장시켜 베드로의 권능을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의 계승자로서의 교황의 권위를 강조한다. 기진장의 작성자는 이렇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교황의 순서로 체계와 논리를 부여하고 있다. 후반부도 역시 논리적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문둥병 치료의 기적을 설명한 다음, 그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기증이 이루어진다. 왕관과 왕권의 상징물을 모두 교황에게 주고 다시 로마와 이탈리아와 제국서부 지역을 증여한다. 이렇게 논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내용은 반복법을 통해 그 내용이 강조된다. 교황 실베스테르에 대한 극존칭의 칭호에 대한 반복은 물론 중요한 내용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삼위일체, 베드로의 권위, 로마교회의 우월성 이론 등이 내용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특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진장은 단순한 한 사람의 문학적 오락이

 

50) Janet Nelson, Kingship and empire, in The Cambridge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c.350- c.1450, ed. J. H. Bur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 231.

51) M. Deanesly,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p. 293.

52) W. Ullmann, Growth of Papal Government, p. 85.

53) R. W. Southern, Western Society and the Church, pp. 92-93.

54) R. Folz, Concept of Empire, p. 11.

 

아니라 교황청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위조된 문서였다. 기진장의 작성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기진장을 위조하였다. 첫째, 로마 카톨릭 교리를 정통이라고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로마교회를 위협해 왔던 아리우스파 이단과 비잔틴교회의 성상파괴주의의 위협 앞에서 로마교회의 교리를 정통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로마교회가 여타의 교회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로마교회의 수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포함한 여타 교회와의 경쟁을 배제하고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통일을 염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를 세속적으로 지배할 권리의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고대 로마황제의 정통 계승자로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비잔틴 황제를 대신하여 교황이 반도의 세속적 지배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근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또한 프랑크인들이 군사적 원정을 통해 정복한 이후에 이탈리아 영토를 침탈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고 교황이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전 세계전 인류에 대한 유일한 지배자 자격을 교황에게 부여하고자 하였다. 위작자는 8세기 중엽 당시의 유력한 세력가들인 프랑크왕이나 비잔틴황제 등의 경쟁자들을 배제하고 세계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진장은 이렇게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입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을 통해서였지만 그 내용 속에는 교황의 뜻을 실었다. 그 속에는 그 동안 교황청에서 꾸준히 발전시켜왔던 교회의 정책, 즉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교황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원대한 계획과 목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기진장은 과거 전통적 교회이론의 종합이면서 동시에 얻고자 하는 권리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진장 속에는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교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담겨있다. 그러나 위작자는 그 거대한 지배이데올로기를 가리기 위하여 내용을 신앙으로 포장하였다. 신앙의 논리를 통해 교황이 추구하는 목적을 합리화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신의 징벌이라는 위협을 통해 의심의 여지를 차단하였다. 기진장은 이렇게 신앙의 원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위조 사실을 가리기가 어려웠고, 이 놀라운 문서는 9세기부터 1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중세인들에게 부동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55) 바로 이 위조된 문서를 근거로 수많은 교회법학자, 교황권론자들의 이론이 파생되었으며, 이 가짜의 법적역사적 문서를 근거로 그 후 수세기 동안 교황들은 서유럽에서 실제로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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