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유대인과 이스라엘

올드코난 2010. 6. 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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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이스라엘

 

(1)유대인의 시작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으로 아내 사라, 조카 롯과 함께 바빌론의 대도시 우르(Ur)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우르를 떠나 유목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사라는 그에게 이렇게 권했습니다. 그 내용은 하녀 하갈과 같이 자서 자식을 얻으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게해서 유대 역사에 중요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일때 사라는 첫아들인 이삭을 낳습니다.(이스마엘이 첫 아들이다라고 말씀하는 분이 계실 것같애서 하는 말인데 이스마엘은 서자이기 때문에 이삭이 첫 아들로 된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찬양의 땅 가나안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의 전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2)
떠돌이 민족이 되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웃나라와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은 아시리아 인과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정복당합니다. 기원 전 6세기 유대 민족들은 바빌론의 정복자들에 의해 가나안 땅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영웅인 유다 마카비가 봉기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해방시킵니다. 그가 죽은지 꼭 100년째 되던 기원전 63, 이번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됩니다. 유대인의 봉기는 무참히 진압되었고 70년에 걸쳐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전세계를 방랑하는 떠돌이 민족이 됩니다.

쫓겨난 유대인들의 이주, 또는 이산을 그리스어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합니다. 유대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 입니다. 쫓겨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 프랑스, 영국으로 이동했습니다.

스페인 출신 유대인들을 히브리어로 세파르팀(Sephardim)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피신하여 동유럽으로 이동하였는데 독일계 유대인들은 아슈케나짐(Aschkenasim)이라 불립니다.


(3)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다

19
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유대 민족 운동이 일어나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시온 국회가 열렸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이곡을 수도로 삼고 솔로몬이 거대한 성전을 지은 유대 민족 성지입니다. 이 이름에서 유대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시온주의(시오니즘)이 나왔습니다.

1901
년 팔레스타인 땅을 사기 위한 유대인 국가 기금이 생겨났고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1909
년 돌아오는 유대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텔아비브가 건립됩니다.

1917
년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는 팔레스타인 땅안에 유대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을 유대인도 아랍인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벨푸어 선언은 1939년에 폐기됩니다. 아랍인들과의 유혈 충돌 끝에 1948년 영국이 물러나자 5 18일 이스라엘이 건국됩니다.


(4)
전쟁을 벌이다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부정하고 아랍연맹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침입, 1차중동전쟁이 터졌습니다.

그 후에도 세번이나 더 벌어졌습니다. 수적으로 불가능한 이스라엘이 전체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미국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감싸는 이유는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막강한 돈과 언론으로 미국 정부를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5)
로스차일드가

로스차일드가문은 프랑크푸르트의 금융업자가문입니다. 독일 출신이며 이름자체가 독일식 유대이름이니 원래 발음은 로트실트로 로스차일드란 영국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전유럽을 돈으로 휘어 잡은 거부 유대인 가문입니다. 이 가문을 크게 일으킨 사람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입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게토출신으로 고리대금업으로 출발하여 거금을 모아 로트실트, 즉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하고 빈, 런던, 파리, 나폴리 등지에 지점을 개설하고 아들들을 지점장으로 보내 전 유럽을 잇는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 후 각국정부, 권력층과 밀착하여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였습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아들들

프랑크푸르트(독일) 암셸 마이어 로스차일드(1773~1855)
(오스트리아) 잘로몬 로스차일드(1774~1855)
런던(영국)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 (1777~1836)
나폴리(이탈리아) 카를 로스차일드(1788~1855)
파리(프랑스)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1792~1868)

유럽에서 큰전쟁이 있을 때마다 로스차일드의 돈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그의 돈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유럽역사가 뒤바뀌곤 했습니다. 영국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금융업에서 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꿰뚫은 인물입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졌을때 그는 통신원을 매수했습니다. 영국군과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런던에는 패전소석이 알려졌고 런던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 런던의 주식가격은 무려 90%나 폭락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이 주식들을 휴지가격으로 사들여 런던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던 모든 주식의 62%를 쥘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로스차일드가는 1875년 수에즈운하 건설에도 융자해주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정부에 돈으로 압력을 넣어 유대인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유도했습니다.

2
차대전 뒤 이스라엘 건국에도 로스차일드는 거액을 융자했을 뿐더러 동유럽과 남미에도 진출하여 세계 금융시장과 산업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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