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전차와 복합궁의 시대

올드코난 2010. 6. 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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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복합궁의 시대(청동기 군사혁명 )

 (최초작성자는 모름, 네이버에서 퍼온 것)

인류의 최초의 전쟁은 구석기 말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최소한 신석기 시대 이후로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석기의 전쟁은 국가 간의 조직적인 전투라기보다는 부족간의 약탈 전쟁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 즉 국가 혹은 정치적 집단 사이의 조직적인 전투는 청동기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다. 기원전 4000년 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복잡한 사회구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직 석기를 도구로 사용했으나 500년도 지나지 않아 청동기가 등장하면서 최초의 조직적인 군대를 탄생시킨 청동기 군사혁명이 시작됐다.

약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은 전차와 복합궁을 생산했다. 그리고 석기시대에는 없었던 무기류인 판금갑옷, 투구, 만곡도(sickle sword), 찌르는 도끼 (penetrating axe) 등 이후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널리 쓰인 무기의 기본형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무기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의 부족 중심의 원시적인 군대와는 비교되는 전문적인 군대를 지탱할 수 있는 사회의 변화가 청동기의 등장과 함께 찾아왔다. 특히 농업혁명과 더불어 가능해진 도시의 등장, 대규모 인구를 통제할 목적에서 발생된 발달된 중앙정부, 관계시설의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대규모 동원체계 등은 최초의 조직적인 군대 및 상비군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기원전 4000 년 경 인류 최초의 도시가 생겨났을 때 인류는 이제 막 부족사회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나 그로부터 200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기원전 2000 년경에는 청동기로 무장한 강력한 대규모 군대가 세계 주요문명들에 퍼지기 시작했다.


1.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군사혁명.

인류 최초의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 인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세계 최초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수메르 인들은 기원전 2700 년경에 이르면 고도로 발달된 통치체계 및 군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혁명적인 전쟁의 변화가 일어난 시점은 기원전 3000 년경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정복자인 사르곤 대왕의 출현시기인 기원전 2316년 경까지이다.


A.
최초의 문명국가 수메르의 무기혁신:

최초의 문명국가 중 하나인 수메르는 원래 여러 도시국가들이 잦은 전쟁을 일으키는 지역이었다. 더불어 끊임없는 유목민의 침공에도 대비해야 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전쟁 때문에 수메르 지역은 당시에 가장 발달된 군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특히 수메르 인들은 최초로 바퀴를 만들어냈고, 최초의 청동 판금갑옷, 초기형의 전차, 최초의 팔랑크스 (밀집진형), 찌르는 도끼 (penetrating axe), 투구 등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무기들을 많이 생산해냈다.

수메르인들의 가장 혁명적인 기술은 바로 전쟁에서 새로발명된 바퀴를 응용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약 기원전 2500년 경부터 전차를 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전차는 바퀴가 4개인 4륜 전차로 4마리의 말이 끄는 형태의 전차였다. 수메르인들의 전차는 후대에 등장하는 전차보다 묵직하고, 바퀴도 원반형태의 무거운 바퀴였기 때문에 오직 평지에서만 활동이 가능하고 장거리 운행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바퀴와 마차, 말의 결합은 후에 아카드 인이 발명한 기동력 있는 2륜 전차의 발달을 가능하게 해줬다.

수메르 인들은 또한 최초로 금속 판금갑옷 및 투구를 탄생시켜다. 수메르인들의 갑옷은 두 개의 청동판을 가죽끈 으로 묶은 형태였는데, 청동 갑옷의 등장으로 석기시대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로 활약했던 석기 철퇴(Stone Mace)가 무의미해졌다. 따라서 수메르 주변의 석기로 무장한 유목민들은 더 이상 수메르 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청동갑옷을 무력화 시킬 목적으로 찌르는 도끼가 만들어졌다. 도끼는 석기 시대부터 등장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무기 중에 하나이나, 날이 뭉툭해 날카롭지 못하고, 날 부분을 줄로 묶었기에 쉽게 날이 떨어져나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찌르는 도끼는 청동기 날을 창대에 끼우는 형태로 만들어 큰 충격에도 날이 쉽게 빠지지 않게 하고 도끼날을 얇게 만들어 더욱 우수한 관통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새롭게 등장한 찌르는 도끼는 이후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도끼의 기본형이 되고 청동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B.
수메르인에 의해 창설된 세계 최초의 군대

이러한 무기의 발달 이외에도 수메르 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최초의 군대를 만들었다. 수메르 인들은 세계 최초로 전문무사 계층으로 이루어진 상비군과 주민들의 일부를 군대에 징병하는 징병제를 탄생시켰다. 수메르의 주요도시는 각기 약 3 5천여 명의 주민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2600년 경에 이르면 수메르의 각 도시들은 600~700명의 전문무사로 구성된 상비군이 핵심을 이루고, 최대 수천 명까지 동원되는 징병된 일반인들로 세계 최초의 군대를 탄생시켰다.

민간인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문적인 상비군의 출현은 상당한 훈련도를 요구하는 밀집진형(팔랑크스)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줬다. 이후 세계의 주요 문명국가들의 기본진형 형태가 되는 밀집진형은 각 병사들이 대오를 맞추고 1열의 병사가 쓰러지면 2열의 병사가 그 빈자리를 메꾸는 식으로 집단적인 힘으로 적에 대항하는 형태의 진형이었다.


C.
최초의 정복자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의 군사혁신: 2륜 전차와 복합궁의 발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한 아카드의 사라곤 대왕 (기원전 2300년 경)은 두 가지의 혁명적인 군사기술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소개했다. 첫 번째는 최초의 전차의 도입이고 두 번째는 사라곤 대왕의 아들 나람 신 (기원전 2254~ 2218) 시절에 소개된 복합궁이었다. 전차는 이미 수메르 인들이 발명을 했으나, 수메르 인들의 전차는 육중하고 느려 전술적인 활용도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카드 인들의 전차는 바퀴를 4개 다는 대신 2개를 달았고 전차의 무게도 줄었다. 따라서 전차의 속도가 빨라지고, 좀더 다양한 지형에서 활용이 가능해 전차의 장거리 원정이 가능해 졌다. 보병보다 훨씬 빠르고, 장거리 원정에 동원될 수 있는 전차의 등장은 아카드 인들이 최초로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는 원동력이 됐다.

복합궁(유명한 고구려의 맥궁이 복합궁의 일종)은 아카드 인들의 또 다른 신무기였다. 기원전 2200 년경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 복합궁은 짐승 (대게 소)의 힘줄, 나무, 소뼈 등을 혼합해 만든 활이었다. 복합궁은 기존의 단순궁 (한 가지 재료로 만든 활) 보다 사거리가 월등하게 길고 관통력 또한 뛰어났다. 일예로 석기시대부터 사용된 단순궁의 사거리는 50~100 야드 정도 밖에 안 되고 가죽갑옷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관통력이 약했으나, 새로 등장한 복합궁은 사거리도 200~ 300 야드 로 단순궁 보다 월등하게 길고, 가죽갑옷 쯤은 쉽게 관통하고, 초기형의 청동갑옷도 관통이 가능해 월등한 관통능력을 가졌다.

보병보다 빠른 기동력을 보유한 전차와 월등한 관통력과 사거리를 가진 신무기인 복합궁의 조합은 전차가 청동기시대의 전장을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전차는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보병의 화살 사거리에 접근하지 않으면서 화살 사격을 하다가, 화살공격으로 보병의 진형이 무너지면 돌격해 보병을 완전하게 격퇴하는 전술을 썼다. 기동력에서 떨어지고 장거리 공격에서도 떨어지는 보병들은 전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카드 인의 전차는 2마리의 말이 끄는 한 대의 전차 위에 1명의 궁수, 1명의 마부, 1명의 접근무기로 무장한 창병 등 3명이 1대의 전차에 탑승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복합궁으로 무장한 궁수는 장거리에서 적을 상대하고, 도끼, 창등 각종 접근 무기로 무장한 창병은 접근전 및 돌격전에서 활약했다. 이렇게 3명이 한 조를 이루는 방식의 전차는 이후 세계 주요문명국 (지중해 동부, 인도, 중국 등등)의 전차의 기본형이 됐다.

사르곤 대왕은 전차의 도입 외에 군대의 규모를 대거 확장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각기 600~700 명의 상비군을 유지하던 것과는 달리 사르곤 대왕은 상비군 규모를 5000~6000 명 규모로 확장했다. 이들 상비군은 전투에만 전념하는 직업군인들로 왕에게만 충성하는 친위군단이기도 했다. 이들 친위군단은 사르곤 대왕의 정복전쟁을 가능하게 해줬다. 이와 더불어 정복된 영토에서 군대를 징발하는 정책을 써 최대 수만 명 규모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기원전 4000 년경만 해도 인류의 군대는 석기로 수십 ~수백 명 규모의 원시적인 부족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청동기로 무장한 강력한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린 국가가 탄생하게 됐다.


2.
이집트의 군사혁명:


A.
구왕국 및 중왕국의 이집트 군제: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비슷한 시기에 문명을 생성했으나, 동시기의 메소포타미아 인들처럼 발달된 무기체계를 갖지는 못했다. 이는 이집트가 통일된 이후로는 남쪽의 누비아 인들이 유일하게 이집트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으나 기원전 2200년 경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남쪽 국경에 여러 요새들을 건설한 이후로는 누비아 인들도 더 이상 이집트에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긴 평화 때문에 이집트 인들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린 수메르 인들과 달리 무기체계를 발달시킬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군대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는 일찍부터 징병제가 발달했다. 이집트에서는 100 가족 중에 1명을 군인으로 징병하는 전국적인 징병제가 일찍부터 실행됐다. 구체적으로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각 부족장들이 책임지고 정해진 군대를 제공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집트는 최대 6만 여명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집트는 중앙 집권화 된 군대를 보유하지는 못했다.

중왕국 (기원전 2040~ 1786)부터 시작된 이집트의 혼란기는 군대조직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전의 부족장 중심으로 조직된 군대와는 달리 파라오를 중심으로 군대조직이 재편됐다. 특히 보급을 담당하는 장교, 돌격부대 장교, 교관 등 전문적인 장교계급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으로 약화된 이집트에게 힉소스의 침공은 결정타였다.


B.
힉소스의 침공과 신왕국의 군사혁명: 청동기 군대의 완성

중왕국을 멸망시킨 힉소스가 이집트에 침공해 올 당시 이집트의 주력은 창병과 궁병으로 구성된 보병대였다. 힉소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여온 발달된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아직도 보병대에 의존하는 이집트 군대를 쉽게 격파했다. 힉소스는 강력한 복합궁으로 무장한 데 비해 이집트는 아직 원시적인 단순궁을 쓰고 있었고, 기동력 있는 전차와 강력한 화력을 가진 복합궁이 조화된 힉소스의 전술은 이집트의 보병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특히 힉소스 인들은 청동기로 만든 만곡도 (sickle sword, 낫처럼 생긴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청동검)로 무장해 갑옷을 입지 않은 이집트 보병대를 학살했고, 이집트인들의 주력무기인 철퇴(Mace)는 청동갑옷으로 몸을 보호한 힉소스 군인들에게 무력했다. 이집트 군대가 보유한 원시적인 청동도끼는 힉소스 인들의 발달된 형태의 찌르는 도끼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후 이집트는 힉소스의 전쟁기술을 받아들여 힉소스 인들을 몰아내고 신왕국 (기원전 1560~ 1085)을 건설했다. 특히 이집트의 나폴레옹 이라고 불리는 투트모세 3 (기원전 1504~ 1450)의 치하에서 이집트 군은 한층 발달된 군대를 만들었다. 투트모세 3세는 징병제도를 기존의 100 가구에서 1명 징병하던 것을 10명의 1명으로 개혁하고, 군대의 총수권을 장악했다. 각 보병대와 전차는 사단, 200인대 등 조직적으로 편제를 가졌고 파라오의 군대는 전문적인 장교계층이 지휘했다. 그리고 군사학교를 창설해 장교의 질을 획기적으로 놉혔다.

투트모세 3세는 또한 전차와 보병대가 조화를 이루는 전차 보병대 합동전술을 발달시켰다. 보병은 전차부대를 보조하고 전차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방어진형으로 활용됐다. 반면에 전차부대는 복합궁으로 무장한 전차부대가 장거리에서 상대를 요격하고, 상대의 진형이 무너지면 전차부대를 적 부대에 돌격시켜 적군을 유린했다. 그리고 보병 뒤에 대기하고 있는 예비 전차대는 적군의 약점이 들어나면 그 곳으로 투입해 전세를 결정지었다.

또한 투트모세 3세는 전차를 수리하는 수리고 를 제국 곳곳에 만들어 전차를 유지하게 하고, 군대의 지원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리고 군대를 관리하는 전문 관료층을 대거 배치하고, 첩보 기관도 새로 창설했다. 소로 이끄는 수레의 도입, 군대식량을 나르는 해군의 창설 등으로 이집트 군은 인제 대규모 원정이 가능해졌고, 바다를 건너는 상륙작전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개혁으로 투르모세의 군대는 최소 2000 여대 이상의 전차를 소유한 강대국이 됬다.

이집트 군대는 다만 기병을 양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말이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해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수를 장기간 태우고 이동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는 기수를 안정적으로 말에 고정시킬 수 있는 안장이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기병은 군사적으로 활용이 불가능했다. 기병의 등장은 기원전 1000년 경 앗시리아 인들이 최초의 기병을 도입할 때 까지 전장의 주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집트 인들은 힉소스 인에게 받아들인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동지중해를 지배하는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왕국 시대에 이르르면 복합궁이 주력무기인 전차와 이를 보조하는 보병대가 전차를 뒷받침하는 전술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다. 메소포타미아 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에 이르러 거의 완성이 됐다고 볼 수 있다.



3.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의 영향.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은 기원전 1500 년경에 이르면 전차와 보병이 협동전술을 이루는 형태로 거의 완성된다. 이후 전차와 복합궁이 전장의 왕자가 된 형태의 전투방식은 기원전 1500 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신기술로 무장한 아리아 인이 인도 정복을 시작하면서 인도에 전파되고, 기원전 1200 년경에는 중국의 은나라에 전파돼, 은나라와 주나라가 주위 부족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된다.

청동기 군사혁명은 주로 당시의 주요문명국만이 수혜자였다. 이는 청동기를 만들려면 주석과 구리가 필요한 데, 주석은 자연적으로 많이 생산되는 광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때문에 발달된 사회제도를 가진 문명국가들만이 대규모의 청동기를 무장한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고, 이는 청동기 군사혁명과 더불어 생겨난 신군사기술 들과 더불어 세계의 주요 문명국들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4.
청동기 군대의 종말.

전차와 복합궁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군대는 기원전 1200년 경 중동에 철기로 무장한 군대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그 종말을 맡는다. 가격이 비싸 소수만 생산이 가능했던 청동기와는 달리 철은 광물량이 풍부해 주요 국가들이 아니라도 쉽게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철기로 무장한 대규모의 보병대는 복합궁과 청동기로 무장한 전차 부대를 전장에서 쫓아냈다. 이어 앗시리아 인들이 기원전 1000년 경 기수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안장과, 중무장한 기수를 태울 수 있는 강력한 군마를 교배해 내 기병을 도입함으로써 전차와 복합궁의 시대는 점차 끝나가고 기병과 보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중동에서는 기원전 1000년 이후 철기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의 시대가 시작되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년 경 무렵인 전국시대부터 전차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보병과 기병의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참고문헌:

Robert Drews

The End of the Bronze Age: Changes in Warfare and the Catastrophe Ca. 1200 B.C. "
Richard A. Gabriel
“The Great Armies of Antiquity"

참고한 웹사이트:

http://www.au.af.mil/au/awc/awcgate/gabrmetz/gabr00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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