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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국사-조선 56

임진왜란 함경도 탈환 북관대첩(北關大捷) 승리과정

북관대첩(北關大捷)은 1592년~1593년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과 여진족들을 모두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로 최악의 상황에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임진왜란 함경도 탈환 북관대첩(北關大捷) 승리과정 1.전투전 상황임진왜란 발생후 얼마 안 돼 한양을 함락시킨 왜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2만 2000명의 군대는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무능한 장수와 훈련이 덜 된 조선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가토는 함경도를 손쉽게 장악한다. 여기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붙잡힌 상황이었고, 조선 영토의 끝 온성까지 왜군이 진격해 올랐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이 틈을 타 북쪽의 여진족이 침입하고 정말수,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까지 일으키..

임진왜란 4차에 걸친 경주전투 의의

경주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선조 25) 4월∼8월 사이에 박진(朴晉)·박의장(朴毅長)·이장손(李長孫) 등이 경주에서 네 차례에 걸쳐 싸운 전투 전체를 뜻한다. 1. 1차 전투는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때마침 경주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후임으로 오는 변응성(邊應星)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에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이 군민 수 천 명을 모아 성을 지키려 했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해버렸다. 이튿날 왜군은 영천을 점령하고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주는 왜적에게 무혈점령당하고 말았다.1차 전투는 사실상 완패였고 전투라고 할수도 없..

임진왜란 의병 이정암의 연안전투

[들어가기전] 연안전투의 주역 이정암(李廷馣, 1541년 ~ 1600년):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연안성을 지켰다. 본관은 경주, 자는 중훈, 호는 사류재와 퇴우당, 월당이고 시호는 충목이다. 1558년 진사가 되어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자와 주서를 거쳐 1578년 양주시 목사가 되었다. 이후에 장령, 사성, 장악원정을 거쳐 1587년 동래 부사가 되고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개성을 방어했으며 개성이 함락당하자 황해도로 후퇴해 의병들을 모아 활약해 황해도초토사가 되었다. 그리고 연안 전투에서 일본군 3000명을 격파해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어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593년 전라도관찰사, 1596년 충..

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제해권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들을 격멸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는 4차 출정은 부산 등지에 주둔에 있던 왜의 수군들을 차례로 몰살시키 위한 출정으로 여러차례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부산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남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 1. 전투 전 상황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임진왜란, 원주 백성을 살린 영원산성 전투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원주 목사 김제갑이 강원도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항해 영원산성에서 벌인 항전으로 군민 모두가 항전하여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강원도 지역 중 유일하게 원주 백성들만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임진왜란, 원주 백성을 살린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 1.배경원주 목사 김제갑은 1592년 1월 3일(1591년 음력 11월 19일) 68세의 늙은 나이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많이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에 ..

임진왜란, 의병과 승병이 거둔 승리 청주 전투(淸州戰鬪)

청주 전투(淸州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과 승병이 연합하여 전투를 치러 승리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고 이후 제2차 금산 전투로 이어졌다.임진왜란, 의병과 승병이 거둔 승리 청주 전투(淸州戰鬪) 1.전투 전 상황당시 청주는 일본군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되어 충청도 방어사 이옥은 도망쳤고 이후 일본군 제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 성에서 머물다가 휘하 장수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남겨두고 떠났다. 한편 충청도의 의병장 조헌은 1592년 6월 30일(음력 5월 21일) 10차례에 걸쳐 유생들을 회동하여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여 의병을 모집해 옥천에서 봉기했다. 조헌은 첫 싸움으로 차령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이를 무찔렀고 이후 일본군이 청주를 장악하자 충청도 서남쪽 온양, ..

임진왜란 같은날 전라도에서 승리한 안골포 해전, 우척현 전투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치러진 전투가 안골포 해전과 우척현 전투다. 이 전투 모두 승리로 장식을 하면서 7월 10일은 조선군 승리의 날이 되는데.임진왜란 같은날 전라도 땅과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안골포 해전, 우척현 전투, 전라도를 지켜낸 의병과 조선 수군. [안골포해전]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1.전투 과정이틀 전인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왜군을 섬멸한 조선 수군은 안골포에도 왜군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곧장 이동한다. 왜의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42척의 함대였다.7월 10일 새벽 조선 수군은 일본..

임진왜란, 의병들의 혈전 패전 아닌 패배 금산 전투, 칠백의총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과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임진왜란, 의병들의 혈전 패전 아닌 패배 금산 전투(錦山戰鬪), 칠백의총 1.배경충청도 금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2. 1차 금산전투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의병장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으로 막내 아들 고인후와 의병 7000명을 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해전사에 남을 학익진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한산도 대첩과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데 한산도대첩에 대해 알아 본다.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의 전략적 승리 세계 해전사에 남을 최고의 작전 학익진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전투 전 상황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일..

임진왜란 일본의 전라도 진격을 막은 조선의 승리 이치 전투(梨峙戰鬪)

이치 전투(梨峙戰鬪)는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웅치 전투 다음날 벌어졌는데, 두 전투를 하나로 연결해 봐야 한다.(이전 웅치전투 참조)임진왜란 일본의 전라도 진격을 막은 조선관군의 승리 이치 전투(梨峙戰鬪) 1.전투 전 상황당시 일본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도요토미가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명령하여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한다. 서울에 있던 고바야카와는 창원에 주둔하던 별군 2000 여명을 의령을 거쳐 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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