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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국사-조선 56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선조의 망나니 아들 임해군 (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

선조는 그 자신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자식들 역시 문제가 많았는데, 이들 중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이 대표적이며 간략히 정리해 본다.회령의 변고 사건,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과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𤣰) 등 선조의 망나니 아들들 정리우선 선조의 부인과 자녀들부터 요약해 본다.1.선조의 부인과 자녀(1)정비 :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자녀 없음, 광해군 혼(光海君 琿)이 법적으로 양자가 됨(2)계비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 1606 - 1614) *적장자, 광해군에게 처형당함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 1685년):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

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당시 강화협상중이던 시기 정유재란 발발 1년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해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1.반란 전왕족 서얼 출신인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2. 반란 선동과 진행수년을 끈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흉년까지 겹쳐 ..

임진왜란 강화 회담

임진왜란 제2차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그리고 강화 회담과 소강상태. 1.제2차 당항포 해전 이순신장군의 12번째 해전으로 1594년 4월 23일(음력 3월 4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아군 연합함대 124척을 출전시키고 부하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의 왜군들을 치게 했다. 새벽에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2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선발했다.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창원시 진동면 진동리 진해선창에 정박하던 왜선 10척을 협공하여 창원시 진동면 고현리 읍전포에서 6척을,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어선포에서 2척을, 나머지 2척은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 아자음포에서 격침시켰다 이순신과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나머지 함대..

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한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1.광해군의 활약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해 한양으로 진군한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고 신립의 탄금대에서 대패하자. 조선 선조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다.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1.왜의 한양 입성과 도망치는 조정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

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 제2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장수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 1.배경임진년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부터 13일(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약 3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쳤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한다. 이듬해 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 의미와 결과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도 불리고,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로 불린다.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幸州大捷) 의미와 결과 1. 전투 배경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된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임진왜란 중 벽제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어난 명과 일본의 전투로 명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 : 일명 숫돌고개)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 군대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전투전 상황4차에 걸친 평양선전투 끝에 1593년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탈환된다.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전선에서 무단이탈하는 등 일시적 혼란 상태에 있었다. 부교(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북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 장수들을 한성(漢城)으로 모아 전력을 가다듬..

임진왜란 경기도 수원 독성산성 전투 (독산성 전투)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 혹은 독산성(禿山城)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벌인 전투로 이치전투 이후 승리를 거둔 전투다.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들을 궤멸시켰다.임진왜란 경기도 수원 독산성 전투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戰鬪)*독산성(禿山城)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1.전투전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용인 전투에서 5만 명의 남도근왕근이 궤멸당한 후 용인 전투 참전 장수 중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임진년 말경에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 패배의 전철을..

임진왜란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인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에 대해서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1.전투전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 공략을 명령했다. 2.전투 상황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은 군사 3만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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