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선조의 망나니 아들 임해군 (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

올드코난 2015. 4. 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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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그 자신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자식들 역시 문제가 많았는데, 이들 중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이 대표적이며 간략히 정리해 본다.

회령의 변고 사건, 왜군에 포로로 잡혔던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과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𤣰) 등 선조의 망나니 아들들 정리

우선 선조의 부인과 자녀들부터 요약해 본다.

1.선조의 부인과 자녀

(1)정비 :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 자녀 없음, 광해군 혼(光海君 琿)이 법적으로 양자가 됨

(2)계비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

-영창대군 의(永昌大君 㼁, 1606 - 1614) *적장자, 광해군에게 처형당함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 1685년):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 - 1672)과 혼인

-공주 (조졸)

(3)후궁 :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 - 1577)

-임해군 진(臨海君 珒, 1572 - 1609) *광해군에게 유배 및 처형됨

-광해군 혼(光海君 琿, 1575 - 1641) *조선 15대 왕

(4)후궁 : 경혜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 - 1613)

-의안군 성(義安君 珹, 1576 - 1588) *12세에 죽음

-신성군 후(信城君 珝, 1578 - 1592) *의주 피난 중 15세로 병사

-정원군 부(定遠君 琈, 1580 - 1619): *인조의 아버지 원종으로 문제가 많았다.

-의창군 광(義昌君 珖, 1589 - 1645) *종친으로 인조의 총애를 받음.

-정신옹주(貞愼翁主, 1583 - 1653),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1579 - 1643)과 혼인

-정혜옹주(貞惠翁主, 1584 - 1638),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1582 - 1657)과 혼인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 - 1627),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 - 1644)과 혼인

-정안옹주(貞安翁主, 1590 - 1660), 금양군(錦陽君) 박미(朴瀰, 1592 - 1645)에게 하가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 - 1653),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1591 - 1663)과 혼인

(5)후궁 : 순빈 김씨(順嬪 金氏)

- 순화군 보(順和君 𤣰, 1580 - 1607) * 최악의 패륜아

(6)후궁 : 정빈 민씨(靜嬪 閔氏, 1567 - 1626)

-인성군 공(仁城君 珙, 1588 - 1628) * 광해군과 인조시대 많은 비판을 받고 유배 및 자결명을 받고 사망

-인흥군 영(仁興君 瑛, 1604 - 1651)

-정인옹주(貞仁翁主, 1590 - 1656),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1590 - 1625)과 혼인

-정선옹주(貞善翁主, 1594 - 1614),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 1595 - 1645)과 혼인

-정근옹주(貞謹翁主, 1601 - 1613),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 1600 - 1628)과 혼인

(7)후궁 : 정빈 홍씨(貞嬪 洪氏)

-경창군 주(慶昌君 珘, 1596 - 1644) *초피(貂皮)를 헐값에 사들여 매점매석을 저지름

-정정옹주(貞正翁主, 1595 - 1666),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1595 - 1619)과 혼인

(8)후궁 : 온빈 한씨(溫嬪 韓氏, 1581 ~ 1664)

-흥안군 제(興安君 瑅, 1598 - 1624) *이괄의 난에 왕으로 추대, 패배후 처형됨

-경평군 늑(慶平君 玏, 1600 - 1673) *온갖 패륜을 저지르고도 천수를 누림

-영성군 계(寧城君 㻑, 1605 - 1649)

-정화옹주(貞和翁主, 1604 - 1667),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 1610 - 1666)과 혼인

(9)후궁 : 귀인 정씨(貴人 鄭氏)

(10)후궁 : 숙의 정씨(淑儀 鄭氏)

(11)후궁 : 소원 윤씨(昭媛 尹氏)

요약: 선조의 부인은 모두 11명이며 자녀는 아들 14명, 딸11명(조졸 제외)이었다.


2.임해군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609년 6월 3일(음력 5월 2일))은 조선의 왕자이다.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이며 성은 이(李), 이름은 진(珒)이고 초명은 이진국(李鎭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임해군이 6세 때에 어머니 공빈을 잃었다. 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임해군이 당시 선조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이유다.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도 임진년에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지마 지역 백성들에게 악행을 저질러 미움을 받고 결국 1592년 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매국노)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에게 넘겨졌다.(회령의 변고)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으나, 방탕하고 포악함과 난폭함 등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또한 양사는 임해군이 임란 이후에도 민가를 약탈하거나 공물을 횡령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이유로 파직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선조사후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는 해에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됐다가 교동으로 이배됐다.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그곳에서 죽었다.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라고 보고했지만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임해군은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


3.순화군

순화군(順和君, 1580년 - 1607년 음력 3월 18일) 보(𤣰)는 선조의 6번째 아들과 어머니는 순빈 김씨, 선조의 대표적인 망나니 아들이었다. 그냥 백성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살인을 즐겼다고 전한다. 조선왕조 실록에 순화군의 악행이 많이 거론되며 범죄 대상이 주로 힘없는 평민과 노비들이었다. 어미니 순빈 김씨의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순화군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궁녀 겁탈사건 당시]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퍅하여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였는데 성장하자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살인을 하였으나 부자간의 정의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숨기며 은혜가 의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유사(有司)의 조처에 맡겨두고서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후 대사령으로 인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패악한 행동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출처:선조실록 127권 33년 7월 16일 기사)

하지만 선조는 유배로 마무리 짔는데 아무리 왕족이라도 순화군은 사형감이었다. 종부시에서 재검토를 요청하지만, 선조는 자기 자식이라고 처벌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원으로 유배를 가서는 그곳에서도 관원과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 망나니 짓을 해댔는데 윤화의 아내 맹무녀의 생이빨을 부려뜨려 죽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선조도 어쩔 수 없이 가택연금을 시키는데, 몇 년후 풍에 걸려 1607년 18세로 죽었다. 광해군 즉위 전에 죽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사후에 대한 기록]

이보(李𤣰)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順和君)이라 하고,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 - 선조 209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3월 18일(신사) 3번째기사, 이보의 졸기


4.정원군 (인조의 아버지)

1580년 8월 2일(음력 6월 22일) 경복궁의 별전(別殿)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인빈 김씨 소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부(李琈). 묘비에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였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라고 그의 묘비에는 써였지만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라고 되어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능가하는 선조의 아들들 중 최악의 망나니였지만 아들 인조가 왕이 된후 정원군의 악행이 많이 희석된 것이 당대 선조의 아들 중 가장 욕을 많이 먹었던 자였다.

몇가지 사례를 들면, 과거 시험에 자기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 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 주거나 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고,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했는데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을 데려가서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가서 혈연으론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을 자기 집까지 끌고 갔다가 다른 종친들이 말려서 풀어주기도 했다.(실록 선조 35년 9월 13일조)

그의 악평에 비해 임해군과 순화군에 비래 악행이 덜 기록된 것은 인조가 많이 삭제를 했기때문이라고 봐도 된다. 당대 사람들에게 최악이 인물이 정원군이었다는 점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단지, 순화군이 사이코패스적이었다면 정원군은 권력형 범죄를 많이 저질렀다는 차이가 있다.

사후 둘째 아들 인조가 즉위 후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으로 격상되어 추존왕으로서 원종(元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아내 구씨는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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