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올드코난 2015. 5. 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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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경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로 명나라의 유격 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 70만 명을 파병 준비를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했고 당시 평양성에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강화 교섭을 체결하는 데 중심을 이뤘지만, 거짓된 외교로 삼국(三國)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

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다음해까지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지고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협상의 시간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일본과 명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굳이 조선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기에 종전을 원했기 때문에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화의를 반대한다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아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 왜성을 축조하고 큰 전투 없이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는 명측에 강화에 대한 요구사항을 전하는데 명나라와 왜의 화의 교섭은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결렬을 예고하는 내용이었다.


일본(풍신수길)이 요구사항은 크게 4가지로

①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戡合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팔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이들은 조선은 물론 명나라 측에서도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풍신수길 역시 왜의 군사를 조선에서 철수할 생각이 없던 상황이었다.



1596년 9월 2일 오사카 성에서 명나라의 심유경과 양방형은 명황제의 국서를 왜 측에 전달한다. 당시 국서에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것 외에는 왜의 어떤 요구사항도 없었다. 

협상을 주도한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장수 고니시는 이 국서 내용이 그대로 풍신수길에게 전해지면 협상이 결렬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이들은 명 황제와 풍신수길을 속이기로 한다.


풍신수길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승려 ‘쇼타이 세이조’가 명나라의 국서를 읽을 때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는데, 쇼타이 세이조는 막상 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글을 읽자 도저히 거짓을 말할 수 없어서 국서 내용을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고 만다.

이에 분노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재침략을 명하게 된다.


이 시기 300명에 가까운 통신사들을 이끌고 왜를 갔던 정사 황신은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감지하고 조정에 서둘러 보고를 한다.


그리고 거짓말이 탄로났다는 것을 간파한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가는 도중,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다음해에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는 심유겸 때문만은 아니다. 

풍신수길은 조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당시 조선에 주둔 중인 왜의 군사들이 조선의 남쪽에서 조선과 명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심유경은 정유재란을 늦출 수 있는 상황을 당장의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명황제와 일본의 풍신수길을 속임으로서 감정적인 대립까지 하게 만들어 버렸다. 조금 더 늦게 전쟁이 재발했어도 피해를 줄이거나,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서 전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풍신수길이 1598년 9월 18일 죽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강화 협상의 시간을 조금 더 지연할수만 있었더라면 정유재란은 막을 수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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