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올드코난 2015. 3. 3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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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당시 강화협상중이던 시기 정유재란 발발 1년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해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1.반란 전

왕족 서얼 출신인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2. 반란 선동과 진행

수년을 끈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시기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이몽학의 선동에 크게 호응을 얻었다.

1596년 음력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을 홍산동헌에서 생포하였다. 임천군으로 쳐들어가서는 군수 박진국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을 함락시켰다. 전산현감 정천경은 도주했다. 8일에 청양을, 9일에 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민들까지 합세해 반란군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이몽학군은 10일에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홍가신은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마침 고을에 체재중인 무장 임득의(林得義)는 가솔과 의병 800명을 이끌고 포위된 성안으로 들어와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을 불러들여 함께 수성 계책을 세우고, 인근의 순찰사 신경행,수사 최호, 박동선, 황응선 등이 와서 홍주성에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퇴치하고 위기에 처한 홍주성을 구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끄는 토벌군이 여러번 패퇴하자 권율장군을 진압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호남의 군사를 이끌고 여산을 거쳐 이산까지 진군하였으나 반란군의 형세가 워낙 흉흉하여 충용장군 김덕령에게 급히 지원군을 이끌고 진압군에 합류토록 연락하고 심지어 영남에 연락하여 포로로 잡은 왜군까지 원군으로 보내도록 연락하고 더이상 진격을 하지 못한다.


3. 진압 과정

반란군이 머뭇거리는 사이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장군 이간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판관아병 윤계가 총포를 쏘면 이몽학군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또한 홍주에 살던 무장 임득의, 박명현, 전 병사 신경행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다. 남포현감 박동선도 충청수사 최호와 상의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4. 사건 후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5.반란 사건의 영향

이몽학의 난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바로 선조로 이때부터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공의 큰 장수들 역시 의심하게 된다. 반면 원균 같은 이들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영향을 준다.


6. 억울한 희생자들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잡혀갔다.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다.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을 할 때에 이들의 죄를 물었다. 그 뒤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지만,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 과정에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


7. 이몽학의 난 평가

우선 이난은 당시 혼란상황에서 있을수 있는 상황이고, 당시 백성들 상당수는 의병인줄알고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동자 이몽학 외에는 권력을 위해 가담한 것이 아니다. 진압 초기 이들은 충분히 설득을 할 수도 있었다고 보지만, 가엽게 보기 보다는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여겼다는 점은 당시 백성을 대하는 왕과 사대부의 기득권적인 사고가 문제였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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