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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올드코난 2015. 7. 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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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전투(南原 戰鬪),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

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1.전투전 상황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괘멸한 상황에서 왜군은 9월 17일(음력 8월 7일) 구례를 함락시키고 전북 남원성으로 총진격한다.

왜 육군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 소 요시토시, 왜 육군4군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왜 육군3군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구례에서 합류하여 일부는 수군 대장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과 연락하기 위해 남원 동북과 서남으로 진격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남원성에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가 들어오고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 등이 함께 지키고 있었고,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등이 후원하러 오고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에 주둔했다.

뒤이어 명나라 장수 모국기는 성주, 오유충은 충주, 조선군은 장수 제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이덕형, 김수 등이 흥복군을 조직해 8도에서 모병하고 명군의 계획에 따라 분파했다. 경상좌수사 성윤문, 방어사 권응수는 경주에 주둔해 조령을 막기로 했다.



2.전투 과정

1597년 9월 22일(음력 8월 12일) 왜군은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하고 다음날 9월 23일(음력 8월 13일) 남원성 외곽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으로 조총 사격을 가하고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해 이를 격퇴했다. 명의 장수 양호(楊鎬)는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 설치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9월 24일(음력 8월 14일)부터 일본군은 공성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일본군의 총공세가 임박해지자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전주성의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우충은 전주성 방어를 핑계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9월 25일(음력 8월 15일)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대공세를 펼쳐왔다. 남원성 동남쪽에는 높은 누각을 만들고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해 방어군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이, 또 다른 일대에서는 성 밖의 해자를 매꾸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조명 연합군은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밤에 일본군은 명나라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 동문을 점령하고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을 포위했다. 결국 북문을 지키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여 자결했고 명나라군 역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이 전사했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만이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했고, 접반사 정기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조명 연합군 4000명과 7000명의 남원성의 군민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왜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조명 연합군의 대패였다.


3.전투 결과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전주성으로 진격했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도망갔고 왜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 하게 된다.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후에 충청도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자 보급로가 막힐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충청도 직산을 끝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4.유적지 만인의총

남원에서의 전투는 1593년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맞먹을 만큼 군, 관, 민이 함께 싸우다 희생한 전투로 사후에 이곳에 죽었던 장수들을 기리는 충렬사에 배향했고 시체들을 모아 만인의총도 세웠다. 만인의총은 여러 번의 이장 끝에 1981년 4월 1일 다시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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