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침공해 노략질을 당했던 구례 지역에서 전 남원 전투에서 패해 후퇴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이 의병을 일으켜 들고 일어나 석주관에서 9월과 11월(음력)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정유재란, 전라도 의병들의 장렬히 전사한 구례 석주관 전투
1.전투 과정
당시 구례는 남원과 전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지였기에 일본군은 다시 구례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다. 석주관에서의 전투로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전사한다.
이후 구례 주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10월 31일(음력 9월 22일)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 50명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롯하여 이정익(李廷翼)ㆍ한호성(韓好成)ㆍ양응록(梁應祿)ㆍ고정철(高貞喆)ㆍ오종(吳琮) 등이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화엄사의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12월 16일(음력 11월 8일) 석주관에 집결하고 12월 17일(음력 11월 9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이정익과 고정철이 조경남의 의병과 합세해 연곡에서 진을 쳐 일본군 60명을 죽이고 우리 포로 200명을 구출했다.
이들은 무기공급을 받을 수 없어 나무를 베고 바윗돌을 옮겨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는데, 당시 죽은 왜적들로 인하여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 하여 이때부터 이 고장에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하동으로부터 왜군이 대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 의병과 승병 연합군은 최후의 전투로 '피내' 라 불리는 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해 5의사 의병군과 승병군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왕의성은 일본군에게 바위를 내려 기습했다. 그러나 계속 오는 일본군의 숫자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5의사 의병장들도 모두 전사하고 오직 왕의성만이 살아남았다.
2.사후
1805년(순조 5) 조정에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1946년 지방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석주관에서 항전을 벌이다 전사한 구례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석주관터 길목 왼편에 석주관칠의사묘 (石柱關七義士墓)와 추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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