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蔚山城戰鬪)

올드코난 2015. 7. 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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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울산에서 2차례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지는데, 2번의 전투 모두 매우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로 비록 조명 연합군이 승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전투이며,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전투로 평가 된다.

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 (蔚山城戰鬪)


1. 전투전 상황

조선수군의 명량해전의 승리이후 왜군은 사실상 북진을 포기하고, 조선 3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을 빗고 왜군의 세력은 남해 지역에 한정되게 된다. 지루한 대치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왜군을 확실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게 되고, 당시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 지 의논을 한다. 울산이 왜군의 본거지였기에 울산성의 가토 군을 먼저 치기로 결정한다.


2. 울산왜성(蔚山倭城)

조명 연합군에 의하여 충청도에서 진로가 막힌 왜군은 1597년 9월 16일 남해안으로 군사를 물리고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이때 왜군이 다수의 성곽을 건조하게 되고 울산왜성 역시 이때 만들어 졌다. 축성의 달인이라는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했다.

축성이 시작된 것은 1597년 10월 혹은 11월로 추측된다. 오타 가즈요시의 감독 아래, 모리 히데모토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들과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 일부가 공사를 맡았고 성벽의 자재 중 일부는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된 후, 12월 4일에는 서생포왜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본군의 방어거점 역할을 하게 된다.



3. 전투 병력 상황

-조명연합군: 조선 1만 1500명, 명나라 3만 6000명, 총병력 4만 7500명

-왜군: 울산성 주둔군 1만 6000명, 구원병 8만 명


4. 전투 진행상황

1598년 1월 29일(1597년 음력 12월 23일) 조명 연합군은 조선군 1만 1,500명, 명군 3만 6,000명으로 명나라의 마귀 제독과 합세해 가토 기요마사의 1만 5,000명의 군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이하 울산성)을 공격한다. 울산성이 공격받자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울산성에서 가장 가까운 서생포왜성과 양산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양산에도 군대를 보내 왜군을 압박하고 서생포왜성에서 오는 구원병들을 울산 태화강에서 전멸시켰다. 성이 완전히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말을 죽여 식량으로 삼고,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는 등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심지어 가토 기요마사는 항복 대신 할복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특히 왜군을 괴롭힌 것은 식수문제였다. 왜성은 조명 연합군이 공략을 하기는 어렵게 설계가 되었지만, 급히 만드는 과정에서 우물과 같은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도원수 권율이 명의 장수 양호에게 총공격을 하자고 건의했으나 양호는 장기전으로 왜군이 저절로 무너질 때 기다리자는 쪽으로 결정하면서 전투는 장기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각지의 왜군 구원병들이 집결할 시간을 벌어주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까지 6만(추정)에 이르는 대군이 양산에 집결하게 된다. 구원병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장수이자 제4진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지휘했다. 왜군의 구원병 6만 명은 양산에서 조명 연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울산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1598년 2월 9일(음력 1월 4일) 철수를 결정하고 13일간의 울산성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5천 8백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왜군 역시 6천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정된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으로 퇴각해 수성전으로 방어를 구축한다.


5.전투의 영향

울산성 전투는 승자가 없다고 봐야한다. 피해 규모를 검토해 보고, 당시 조명 연합군이 철수했지만, 왜군 역시 울산성에서 퇴각해 버렸다.

비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왜군의 패전이었다.

울산성 전투이후 왜군은 울산과 순천 그리고 양산 지역을 포기하려했고, 장수들은 모두 공통된 의견으로 일본 본토에 있는 풍신수길에게 탄원서를 보낼 정도였다. 풍신수길은 이 탄원서를 터무니 없다 일축하고 오히려 경주까지 진격을 하지 못한 것을 질책하고 울산을 버리지 말라고 명하지만, 왜군은 울산, 순천, 양산 등의 주요 거점을 포기하고 해안쪽으로 몰리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 역시 서생포왜성에서 방어만 할뿐 공격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울산성 전투는 사실상 전쟁을 종식시킨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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