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정유재란, 사로병진작전 (四路竝進作戰)과 사천 전투(泗川 戰鬪, 사천성전투)

올드코난 2015. 7.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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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전투(泗川 戰鬪)는 1598년 10월, 조선 경상도 사천 선진리왜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인솔하는 시마즈군 7천 명과 약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싸워 사실상 패배한 전투였다. 

정유재란, 사로병진작전 (四路竝進作戰)과 사천 전투(泗川 戰鬪, 사천성전투)


1.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해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 선진리 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에 대해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으로 왜군을 동시에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돌입했다.


2. 전투전 상황

삼로군 중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인솔하는 중로군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시마즈군이 주둔하는 사천 선진리 왜성으로 향한다. 사천 왜성은 왜군의 주요 집결지 부산과 왼쪽 끝의 순천왜성과 남해왜성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함락시키면 서쪽에 있는 일본군을 고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사천왜성 왜군 상황

당시 사천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주축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다소 느슨한 지휘체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모리 가쓰노부가 축성한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하며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要害)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진주성에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주둔시키고 망진 왜성에는 중로군이 남강을 건너 남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에게금 수비를 맡긴다.

영춘과 사천에 성을 축조 및 보수하고 영춘왜성과 사천구성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三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實)로 하여금 각각 수비하게 하여 진주 남강을 최전 방위선으로 삼는다.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의 3성을 사천 선진리왜성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고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인솔하는 7천 명뿐이었다.

소(宗)군이나 타치바나(立花)군이 원군을 신청하였지만, 요시히로는 이 제의를 거절해, 시마즈 가의 군세만으로 조·명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4. 양측 병력상황

(1)조명연합군

-지휘관: 동일원, 정기룡

-병력:명나라 3만 6,800명, 조선 2,215명, 총병력 약 4만 명

(2)왜군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7,000명~10,000명


5.전투 진행 상황

(1)조명 연합군의 사천고성 점령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인솔하는 중로군 4만 명 본대는 1598년 9월 20일 시마즈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을 향해 간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망진왜성, 영춘왜성, 곤양왜성에 주둔하던 병력을 철수시키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결집한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実)에게 수백의 군사를 주어 사천고성을 지키게 한다. 시마즈군은 조명 연합군에 비해 적은 병력이었지만 완강하게 저항한다. 명의 동정군(東征軍)이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압박을 가하자 시마즈는 사천고성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게 좋겠다고 판단을 내리고 전 병력을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이동시키려 한다.

사천고성에서의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한다.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 왜성으로 철수하고, 조·명 연합군은 사천고성을 점령한다.


(2)선진리 왜성 공략 실패.

조명연합군은 10월 1일 선진리왜성 공격을 시작한다.

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의 명을 받은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는 조명 연합군의 식량창고를 불태워 버린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단기전으로 승부를 내기로 결심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연합군의 공격에 조총과 지뢰를 사용해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리고, 쇳조각이나 철정을 포탄 대신에 장전 한 대포도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다 지치자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교란,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전환했다. 조명 연합군의 요시히로군의 완강한 저항과 군량미 부족으로 결국 철수를 하고 만다.

6. 전투 결과

이 전투는 왜군의 승리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명 연합군의 완패는 아니었다.

단지, 사로 병진작전을 지휘하는 명의 장수는 왜의 장수들에 비해 무능하고 겁이 많아, 이길 수도 있던 전투를 철수로 마무리한 점이 아쉽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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