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정유재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

올드코난 2015. 7. 2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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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의 마지막(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며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露梁海戰) 결과 설명 


1. 배경

명과 왜의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왜군은 15만 대군을 동원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초기에는 원균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하삼도를 유린하던 왜군은 이순신의 복귀와 명나라의 원병,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유재란 발발 다음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철수를 결정하고, 겨울이 오기전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피해당사국인 조선은 왜군을 그냥 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2.전투 직전 상황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벌어진 고니시가 있던 순천왜성 전투를 통해 장도해전에 왜의 수군에는 분명 피해를 준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한다.

이때 명의 제독 진린은 장도해전을 거치면서 이순신의 사람이 되었다. 이순신을 존경하게 된 진린은 노량해전 이전과는 달리, 이순신과 싸우기로 결정한다.


3.전투 진행상황

창선도에서 출발한 500척의 전선에 수만명의 정예군사를 태운 시마즈의 일본 함대는 서서히 노량해협으로 접근하여 오고 있었다.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킨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기습 공격을 시작한다. 조선 수군은 왜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진린의 명 수군은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과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진린과 등자룡이 탄 배는 판옥선으로 왜선들보다 튼튼했고 등자룡이 불량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삼도수군 복병장의 함대와 함께 왜선을 공격한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함대는 왜 수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하였고, 어린진을 펼친 상태에 있던 왜 수군 함대는 앞에서는 명 수군, 우측에서는 조선수군 복병장의 함대, 좌측에서는 이순신의 함대에 의해 삼면으로 포위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마침 북서풍이 불기 시작했다. 북서풍을 이용한 명 수군과 복병장의 함대에서 불화살과 신기전, 불 붙은 짚섬으로 화공을 가하자 순식간에 왜군의 함대는 불타기 시작했다. 이는 사전에 이순신이 짠 전술이었다. 매복 기습 후 삼면 포위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가한다는 전술에 왜군이 말려든 것이었다.

화공을 당해 혼란스런 와중에도 왜의 장수 시마즈는 잽싸게 전력이 약한 명의 수군을 공격한다. 명의 함대의 함포로 아군인 명의 장수 등자룡의 판옥선에 불이 난 상황에 왜선이 돌진해 등자룡을 전사시키고 만다. 잠시 기세가 오른 왜군은 진린의 함대로 돌진하는데, 이순신의 함대가 구조하고 다시 왜선들을 포격한다. 치열한 근접전과 화공에 의한 피해에 왜군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된다. 새벽에 벌어진 전투는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른다.

노량에서 여수방향으로 흐르던 물이 방향을 바꾸어 여수에서 노량 방향으로 일기 시작하자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이 파도를 등에 업은 조명연합함대는 왜 수군을 관음포구 안으로 밀어 붙이면서 관음포 입구에 정렬하여 입구를 철저하게 봉쇄, 포위섬멸을 시작하고 왜군은 거센 저항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고 만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가슴을 관통하여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했고 안방준의 은봉전서에는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적었다.

이순신은 "戰方急愼勿言我死(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전투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왜 수군은 500여척 중 50여척의 전선만이 살아 돌아갔다.


4.전투 결과

-조명연합군 피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전사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장수 등자룡 및 500여 명 사상

-왜군의 피해: 전선 200여 척 침몰, 100여 척 연합 수군에게 나포, 150여 척 파손 5만여명 사상

-이 노량 해전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당대 사료는 실록에 있는 이덕형의 보고외에는 없는 편이다. 이유는 지휘관(이순신)이 전사한 탓에 확실한 장계가 없기 때문으로 그래서 세세한 더 자세한 상황은 남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순신이 지휘를 했던 많은 해상전투에서 장수급이 다수 전사한 건 노량해전이 유일하다. 다시 말해 이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해전은 포격전 위주의 전투였다면 노량해전은 적의 섬멸을 목포로 근접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5. 노량해전 결과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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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노량해전승첩제 / -

주소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남해충렬사 및 노량일대
전화
설명
1592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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